촉촉한 이끼는 폭포수 곁둥근 바위 등에초록초록업혀서 소곤소곤 말을 걸고 있었다. 이끼로 폭덮인 바위들은 귀가 살아이끼의 말을 다담다담 담고 있었다. 오솔길의 닳아빠진돌층계에도 푸른 이끼가 속닥속닥 거렸다.길 가 고목의둥치에도이끼가 생생살아있었다. 숲의푸른 공기와 촉촉한 물기를 조금조금 머금어 제 영토를 천천히 넓혀나갔을숲 속 이끼는 숲의 정령이 꾸는꿈같았다.무생물이 생명으로 환원되는꿈.혹은 꿈이 이루어지는 꿈.
난 왜 이러한 이끼 앞에서 그녀를 떠올렸을까.
이곳 문화교실에서 그녀를 만났다. 작년 9월에 마지막으로 본 이후부턴 낙엽색으로 말라버린 이끼처럼 그녀가 통 눈에 띄지 않았다.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스 딸네 가서 그 나라 가을과 겨울을 그녀 몸에 지니고 왔단다. 몇 달 전 골드코스트에서 이사온 그녀와는 통하는 점이 많았다. 그녀가 살던 골코는 내가 8년 넘게살던 곳에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였으니 자주 가던 장소였다. 그녀도 내가 살던 동네구석구석을 구슬 꿰듯 속속 꿰고 있었다.
딸이 둘인 그녀는2년 전 남편을 잃고 이곳 하이스쿨 교사로 일하는 딸 곁에서 살기 위해 거처를 옮겨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몇 해동안줄곧나의 딸과 함께 사는 것과반대로, 그녀는 이사 온 후 3개월까지만 딸과 한 집에서살다가, 하우스 몇 집 건너로 가 따로 살고 있었다. 딸하고 동일한 집에 거주하는 건, 3개월이 충분한 시간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솔직히난,딸 없이 공허해질, 텅 빈집은3일도 못 버틸 것 같은데.이처럼 바위 등에 업혀 살아가는 이끼나 돌계단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이끼가 있듯,우리삶의 빛깔도 무늬도 다양하다. 타인의 삶의 모습을 우린 그래서 때로 흘깃거린다. 이모저모각양각색의 색채를 띠어 세상은더아름다워진다. 가끔은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는 품을 내어 주는 모습이 있어 세상은 더 푸르러진다
그녀가 교실을 떠나 몇 달 동안 프랑스 작은딸한테 가있는동안,내가 그녀를 떠올린 이유는다른 사람보다 의사소통이 좀 더 원활해서다.그녀는 내게 영어를천천히 말해주었다.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이 고장사투리도그녀 영어 속엔 없었다.바느질 문화교실 회원 모두가 나한테 친절하지만, 서로 언어가 이해 안 될 때가 꽤 있다. 그녀와 얘기할 땐마른 이끼처럼 가슴 버석이며 엄습하는고독감을 받지 않았다.나홀로 단절된 것 같은격절감이 반감되었다. 그녀와 대화할 때 나는 바위 등에 업혀 조근조근 말 거는 푸른 이끼가 되었다. 생생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었다.
그녀가 1년에 서너 번씩 방문한다는 프랑스에 머물 때, 그녀도 그 나라 말엔 까막눈이었다. 자신의 딸도 세컨드 랭귀지를 사용하는 걸 목격하였으니, 여기서 외국인인 나와 그녀 딸의 처지가 비슷한 걸퍼뜩,몸으로 익힌 듯했다.내게 동류의식을 느끼는 듯 내가 교실을 들어서면 반색을 하였다. 난 물기를 촉촉이 머금은 푸른 이끼처럼 그녀 옆에 달짝 붙어 앉았다. 서로 사는 이야기와, 영국에서 온라인으로 공수했다는 그녀의 손바느질 소품에 관한 주제와, 프랑스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사는그녀 딸의 스토리와, 그녀의 골드코스코 이야기를 소곤소곤, 속닥속닥 거리다 보면 시간이 저만치에 가있었다.
딸과 나는 숲 속 바위에 앉아보았다.
푸른 이끼는바위귀에 대고 무언가 속살대는 것 같았다. 서로가 내면에서 서로 소통이 되지 않으면 저토록 밀착되게 바짝 붙어살지 못한다. 생명체는 저마다 성질머리를 가지고 세상에 나오기 때문이다. 바위가 이끼에게 발붙일 터를 내어주고, 이끼는 감사의 뜻으로 바위에게 푸른 옷을 입혀 무생명의 바위를 생명체로 환원해 놓고 있었다. 뭔가 서로, 그 둘만의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있었다.
폭포수 곁 바위와 이끼의 우정이 오래 푸르게 이어질 것 같았다. 촉촉하고 그늘진 곳을 선호하는 이끼와, 늘 그 자리에서 이끼의 소곤대는 목소리를 묵언으로 들어주는 바위가 어디서 많이 본, 내게 익숙한 풍경이었다.깊은 숲 속 이끼의 영토가 곧 나의 꿈의 영토였다. 내 영어가 푸른 이끼처럼 내 입에서 푸르고 촉촉이 살아날 그날을 소망하는그런 내 꿈의 영토였다. 숲 속 바위의 이끼가 마르지 않길 바랐다.바위처럼 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