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네 Feb 14. 2023

나이테가 없는 호주 나무


빗소리는 똑같았다.




가 내리면 뜰안 어딘가 숨어있던 청개구리가 우는 경우도 비슷했다. 양철 펜스에 사선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커다란 잎사귀 위로 또르르 구르다 은구슬 되는 비, 꽃송이가 제 집인 촉촉 안기는 비의 몸짓, 페이브먼트 유동 동심제 발을 그리는 비들의 퍼포먼스도 똑같았다. 림하듯 하게 수구 구멍 찾아 흘러버리는 빗줄기 모습 또한 한국 호주 다르지 않았다. 같은 나기와 이슬비가 내렸다.


러나 호주 태양은 한국의 것보다 몇 배 더 뜨거웠다. 한낮엔 잉걸불 같았다. 그래도 그늘밑은 우릴 바로 시원하게 맞아주었으니 타 죽지는 않았다. 아무리 뜨거운 태양도, 그늘 아래로 든 우리는 좇아오지 못했다. 여름철 뙤약볕이 달아오른 무쇠솥만큼 뜨겁기로 소문난 엘리스스프링스에서 우린, 그늘에 들어 잠깐씩 몸을 식다.



나이테는 달랐다.



아시다시피 "나무줄기를 가로로 잘랐을 때 나타나는 둥근 띠모양의 무늬가 나이"다. 의어로 나이바퀴, 성장륜, 연륜, 목리가 있다. 나이테, 이 나이바퀴는 내게 당연한 거였다. 게 모든 나무는 이걸 제 몸에 새기고 있어야 했었다. 이테는 나무의 지문 같은 거였다. 나의 엄지에 지문이 선명하듯 내가 본 나무는 그런 지문을 갖고 태어나는 줄 알았다. 나무가 태어난 해는 무조건 동심원 한 개를 달고 나오는 줄 알았다.


유년시절 나무의 나이를 셈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무단면에 나타난 나이테를 보여주고 동그란 무늬의 숫자가 바로 나무의 나이라 하다. 추운 겨울 동안에는 나무의 성장이 멈추니 짙은 고동색의 동심원이 생겨는데, 그것이 나이테라 하셨다. 난 그때부터 잘린 둥치만나면 늘 나이테를 세어보곤 했다. 어쩌다 내 나이와 동일한 숫자의 나이테와 조우하면 동무같이 그 나무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 나라 나무엔 나이테가 없다는 걸
어슴푸레 알았다.



부쉬워킹을 즐기는 내 취향은 이 나라에 와서도 변하지 않았다. 주변의 산길이란 길은 거의 걸어봤다. 산길을 걸을 때마다 곳곳에 눕혀놓은 우람한 나무둥치를 만났다. 그때마다 나이테 찍곤 했다. 10년이 넘도록 나이테가 잘 나오도록 피사체를 확대해 찍어왔다. 나무 세포는 사람의 살결처럼 맨지르하질 않으니 명쾌하게 단정하어려웠다.


나무의 몸속엔 나이테 대신 또 다른 목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살결도 개인마다 나름의  다른 결을 갖고 있듯이, 잘라낸 나무 단면도 그랬다. 그 결은 슴푸레한 나이테 같기도 했다. 겨울이 없어서 흐지부지, 물에 술탄 듯, 술에 물탄 듯한 나이테가 형성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마치 타인의 속내를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일과도 같았다. 내가 만약 한국의 내 동생한테, 호주 나무엔 나이테가 없어, 그러면 동생이 나무속에 든 잘못된 정보를 세상에 퍼뜨릴 것 같았다. 내가 그 발원지가 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호주 나무엔 나이테가 없다는 걸 내 맘대로 발설할 수 었다.



단순한 이런 사실은 동생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었다. 가령, 이렇게.



옆집 영국커플이 아기를 낳았는데 미역국과 쌀밥을 갖다 주었더니,  그 해산모와 아기아빠가 아기를 안고 갑작스레 놀러를 왔어. 우리 아이들과 같이 한 시간가량 소파에 앉아 환담을 나눴는데 누가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는지 알아? 한 시간이 넘도록 어젯밤에 아기 낳은 산모에게 맡겨놓고, 남자는 떠들네 같이 떠들기만 하다 갔어. *이 얼마나 주는 거 없이 미웠는지.


이 나라 사람들 어찌 보면 굉장히 무모해.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된 아기를  다 큰 아이처럼 어설프게 들쳐 안고 슈퍼에 안고 나오지를 않나, 해변가 잔디에다 갓난아기를 놓고 사진 찍느라 부산 떨지를 않나, 난 막 해산한 이 나라 산모를 보면 걱정돼서 간보가 다 오그라들어!


더 웃기는 건, 그들은 해산하고 바로 수영장엘 간데, 그래서 한국엄마가 자기도 따라 해 봤는데 밑이 헐고 쓰라려서 치료하느라 혼쭐 났었데. 겉보기는 같아도, 신체구조는 같아도 속다른 점이 많은가 봐. 그러니 공연히 그들 따라 하다간 큰코다쳐. 우리 생리에 맞게 살아야겠더라, 고.




그러고 나무의 생리도 사람의 생리처럼, 속내가 달랐던 것이다. 난 그것을 그저께, 이 나라에 산 지 16년 만에야 확연히 알게 되었다. 온대지방 나무는 나이테가 선명하고, 열대지방엔 나이테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간 끈질기게 나이테에 관심을 가져온 결과다. 알고 보면 지극히 단순한 사실이라 부끄럽지만 무언가 뿌듯하다. 내가 과학자는 못되더라도, 내 속에서 나무의 시간을 입은 연륜이 새겨지고 있을 것 같았다. 확실히 알지 못했던 나무의 목리에 대하여, 함부로 발설치 않았던 일도 잘한 일 같다.





왼쪽은 한국나무의 나이테요, 그 외의 것들은 호주나무의 단면이다. 춥고 배고픈 겨울이 없어 나이테가 생기지 않는 대신, 벌레에게 먹히고, 돌멩이를 짐처럼 메고 힘겨운 생을 이어가던 둥치로 있었다. 시련은 어디에나 존재함을, 덤으로 확인했다.



이전 18화 악어를 사랑하던 가족과 동물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