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나네 Jan 11. 2024

생은 별똥별 같은 거


이야기는 약 20년 전 어느 지방에 별똥별이 떨어졌고 그로 인해 한 마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들은 모두 떨어진 별똥별의 흔적을 찾아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차츰 그것이 별똥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김용규, 같은 책, <잠입자> 편 p.209


별똥별 신비는 무지개를 능가한다. 탁구공만 한 쥐란 놈이 눈앞에서 휙 지나가 제 몸을 숨기면 시락거리는 기척이라도 내지만, 별똥별은 속도에 매몰된 듯 살같은 빛의 사선 그 취를 지운다. 성의 신비를 마음에 기듯, 별똥별을 본 사람들은 의 속도로 소원을 말한다. 난 요 근래 이국의 하늘에서 별똥별을 목격했다.  점 한, 찰나의  순간이 지나가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잘쓰게 해주소서! 이 여덟 자의 소원을 유성으로 말해야 했는데, 하고 무릎을 쳤으니. 이미 늦어버렸다.  엉거주춤한 발력!


어쩜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은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거의 시간은 한 점 먼지보다 작을 때가 있다. 그때로부터 15년  과수원 한복판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고, 8년째 되던 해에 한순간에 별이 된 남편을 보내었고, 8년 동안 이천 오백 그루의 배나무와 초, 중학생이  세 아이들을 혼자 키워낸 그 시간들이, 별똥별 지나듯 쾌속으로 흘러가버렸다. 어쩜, 타임캡슐로 가슴 혔을.  전혀 다른 세계, 도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우리 네 식구는 낯선 곳에 떨어진 별똥별, 생판 다른 노동과 학업을 이어 갈 우주 한 점 먼지가 되었다.


자연으로 둘러싸 만 육천 평의 대지를 뒤로하고, 삼십 평의 아파트 상자 갇힌 듯 한 생활은 소꿉장 같았다. 당시 내겐 그랬다. 드넓은 땅 위에서 거칠고 험준한 온갖 노동을 도맡아 할 때 흙먼지와 풀내음은 났어도 두통은 없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가벼운 장을 보고 들어와도 코가 따갑고 몸이 피로해지고 두통이  일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장소에 나갔다 귀가한 날은  메슥거림이 심해다. 분당은 다른 도시에 비해 녹지율이 더 높은 계획도시임에도 내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킨 걸 보면, 내 바디는  컨츄리걸에 적합한 듯!


런 중서도 논술을 가르치기 위하여 아이들을 모집하였고, 이사 온 지 두 달 후부터 학생들이 기 시작하였다. 과수원 때부터 장거리로 다니던 수필반에도 계속 출석하였고, 1년 후부터는 수지의 편집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중2 때 도시로 나큰딸은 자기가 고3인데, 엄마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느냐며 어느 날 현듯 화를 내었다. 난 가정사회성 사이에 낀 나의 좌표에서 잠깐 서성거리다 어쩌지도 못한 채 맡은 일들에 열중하면서, 시간의 강물에 떠밀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논문을 쓰기 시작하여 새벽 두 시까지 독서실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100쪽짜리, 수필에 관한 논문을 완성하였다. 그때 중3이던 큰딸은 묵묵히, 엄마의 과제를 도와주었다. 새벽마다 어깨메고 오는 엄마의 가방을 열 초고로 갈겨 쓰인  글자 한 자 한 자씩 짚어가면서, 자판기를 또닥또닥 두드려아이가 입력해 주었다. 100쪽까지 온전히 다 워드를 쳐 주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너무 대견한 딸이었다. 둘째 딸은 엄마의 가방을 독서실 앞까지 메어다 주며 엄마, 파이팅, 하면서 배시시 웃기도 했다. 그 와중에 난 수필집 두 권을 출간하였다. 렇듯, 구의 삶이 그러하듯 그저 살다 보면 리는 시나브로 깊이로 든다.


도시에 산 지 5년째 되던 해, 6학년이 된 막내가 두통이 자주 있어서 병원에 데려가 보았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평소 밝은 성격으로 서현 로데오거리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서너 번씩이나 제의받았었고, 달리기까지 잘하여 인기를 얻었는지 학급임원으로 뽑히던 그 이가 중학생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은 화장실에서 낯선 형한테 맞았다고 하였고, 또 다른 날은 다른 반 친구한테 맞고 들어왔다. 는 그날 밥벌이 논술수업을 먹어야 했다. 천금 같은 내 아들의 눈가에 핏자국과 멍자국을 확인하고, 그 길로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학교에 달려가서 담임을 만나 때린 아이를 말하였는데, 어린 여교사였던 담임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잠잠하기만 하였다.


난 그저 기가 콱 막멍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만 해젊었던 나도, 처음 겪은 일이어서 어찌해야 하는지, 정답이 없었다. 그냥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와서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엄마, 제발 가만히 있어, 엄마가 학교에 가고 그러면 때린 그 아이가 나한테 더 못 댔게 굴 거야, 라며 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난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아야만 했다. 난제 앞에서 며시 겁도 났다. 나 혼자 어쩔 줄을 몰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 된  많이 생각났다.


해 대학2학년이던 첫째 아이는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난 아이가 비행기 실려 날아가는 광경을 본 후, 집에 돌아와 이별 앞에서 목놓아 엉엉 울었다. 중, 고생이 된 남은 두 아이들이 우는 엄마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난 살고 있 아파트를 팔아서, 큰아이 어학연수 4개월째 되던 날, 호주로 온 가족이 다 함께 가서 영어를 배워오기로 세 아이들과 논의결정다. 세 아이를 차례대로 이런 식으로 떼어놓다가는 어미의 애간장이 저리다 못해, 녹아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기 때문이다. 렵사리 유학수속을 밟아서 도시생활 7년을 접고 도시보다 더 낯선, 또 다른 행성으로 우린 훌쩍 날아왔다. 똥별.


행여 아이들 아빠, 그해외까지 못 따라올까 봐 큰아이 호주수업 시작일 4일이나 지난 우리 결혼기념일날 출국하였으니, 그 호주 하늘까지, 시차 이동하여 리 곁에 착했으리라 안도했다.


많은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이 있었지만... 결코 후회하지도, 누구를 부러워하지도 않았고요... 바로 그게 운명이지요. 그게 삶이고 그게 우리이지요. 우리 삶에 슬픔이 없었다한들 더 낫지는 않았겠지요. 더 나빴을 거예요. 그랬더라면 행복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희망도 없었을 것이고요. 삶이란 그런 것이지요. 김용규, 같은 책, <잠입자> 편 p. 243




* 목요연재를 아직 미완성으로 남겨둘까 합니다. 그간 써 둔 글 6편이 더 있는데, 그저 마음속에다 고이 간직해두고 싶어 졌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만성두통이 있는데, 이 연재가 두통을 부추기네요. 나머지 힘으로  매거진에서 자유롭게 만나 뵙겠습니다.
그간 라이킷과 댓글로써 응원해 주신 글벗님들, 무진장 고마웠어요. 정말요. ♡♡ ^^
이전 07화 폐허보다 보살핌이 쉽다 •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