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을 때 그리고 나를 매료시켰던 딴 세계와 딴 문화와 접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이국적인 것들에 거의 무의식적이고 절망적이리만치 빠져들어갔으며, 이는 마치 짝사랑의 경우와 흡사했다. 이 같은 현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통일할 수 없는 것을 통일하는 것처럼 불가능했던 현상이었다. - 김용규, 같은 책, <노스탤지어> 편 p. 267.
중2, 호주에서 8학년부터 다닌 막내는 아직어리기만 한 사춘기 아이라 생각했었다. 지금 돌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나름 속이 찬 아이였다. 어릴 적부터 영민하고 언어를 잘 구사하여설득력 있는 아이였다. 그림솜씨가남달라서 내가 그림의 길을 가 보라했던 적도 있었다.어느 날 교회 구역예배로 온 구역식구들에게 "우리 엄마는요, 쓰레기도 세일한다면 사 오는 엄마예요." 하고는 싱긋대고 제방으로 쫓겨가는 유머러스한 자식이었다.
얼굴이 갸름하고 하얀 그 아이가 흰 티 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때마다 다른 컬러의 카디건이나 남방을 걸친 채 거리에 나서면 그 주변이 훤할 만큼 인물이 출중한 아이였다.인기가 있는교회오빠였을까. 하이스쿨 때는 학생부회장에 뽑혔다. 교회수련회 때 나는 김밥 30줄을 말아서 들려 보냈다. 그 후 학생부김집사는내 아들 칭찬을 그녀의 침이 마르도록 했다. 모 난 구석이 하나 없이 의젓하며 재미있었고, 아이들 인솔을 스므스하게 잘하더라며, 몇 번이나 내게 다가와서 내 아들의 면을 세워놓았었다.
내 눈에는 마냥 개구쟁이 아이가 자기 큰누나가 다니던 QUT대학 회계학과에 들어갔다. 등교날이면 날마다, 긴 시간을엄마방의 전신거울 앞에턱 앉았다. 합하면 한 줌도 채 되지않을 자기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다 정신일도하사불성으로 온갖 정성을 다 해 외모를 다듬었다. 그놈을 보고 난, 이놈아, 대충 하고 얼른 학교 가, 하면 그놈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내 얼굴은 중소기업하고 다르지, 대기업얼굴을 대충 할 수는 없지요, 하며 거울 앞을고수하곤 했다.
그놈이 어느 날은 또 내게 그렇게 말했다. 엄마, 출석 부르다가 떨컥 멈추고 나를 보고 오, 잘 생겼다, 고 말하는 여교수는 세상에서 첨 봤다, 며 싱긋거리기도 했다.나도 내심 뿌듯했다.그뿐인가. 하루는 또 같은 클래스의중국인 여학생이그놈을 처음 본 날, 글쎄 그놈이조인*을 너무 흡사하게 닮았다며,왕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나. 여하튼 그놈을 본 이웃들도, 지인들도 그놈이 자라면서 점점 핸섬해진다며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자식자랑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 하여도, 난 해야겠다. 미안하지만 한 번만 더 인내하고 들어주시기 바란다. 인내는 쓰더라도 잘 익은 그 열매는 달다, 했으니 복 받으실 테니. 글쎄 그토록 잘 생긴 놈이 잡 Job을 찾는 능력도 출중했다. 그놈은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아이스크림과 샐러드와 스파게티를 테이크어웨이로 파는 샵에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운이 좋아서 그 당시 시간당 페이도 남보다 5불이나 더 높게 쳐주는 샵이었다.
손님들이 뫼비우스 띠인 양끝없이줄을 서 있었다.샵에 들어가면그놈 몸이 닳도록 움직여야 하던,소위 허벌나게 바쁜 가게였다. 이탤리언 오너의 불현듯 부르릉대는 불자동차 같은 성질머리를 빼고는 아이가 다 만족하고 다녔다. 아이가 마감하는 날엔 일이 밤 12시 지나서 끝나는 샵이었다.
나는 내 아들을 픽업하러 가서 근처 어둑한 골목길 차 안에서죽치고 앉아있었다. 그놈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난 마냥 좋기만 했다. 그때마다 내 아들이 다 자란 듯 든든하고 뿌듯했다.일을 끝내고 온 아들이 차에 오르면 아들에게서 노동의 냄새가 확 풍겼다. 가게의 좀 찌든 기름때와 이십 대 청년의 몸에서 나온, 노동 후의 땀냄새가 난 좋으면서도, 그때마다 짠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맥도널드에 들러서 감자칩과 콜라를 테이크 어웨이 하여, 운전하는 나에게 아들이 집어주는 칩스를 먹곤 했다.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건네주던 그 칩스가,내 생애 최고의 맛이라 생각되었다.지엄마를 웃기려고 아이가 개그를 하면서 돌아오는 그 시간은 그저, 에미로서 마음 가득 행복이 차오르던 시간이었다. 집에 도착하여 아이가 씻는 동안에 나는 내방 앞 베란다에 서서 밤에 뜬 별을 유심히 올려다보곤 했다.큰 별 하나가 나를 향하여 반짝거렸다.
아이는그렇게 번 돈으로, 수시로 지엄마한테 선물을 사주었다. 첫 주급을 받은 날,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십분 걸리는 레드클리프라는 바닷가에 데려갔다. 철판에서 자글자글 끓으며 나오는 비프스테이크를 사주었다. 나의 생일날엔 이 세상에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인 걸 알지? 하는 연애편지 같은 생일카드를 쓰고 샤*향수를 사주었다. 이거 고르는 데 호주백화점, 데이비드 존스에서 두시간 넘게 돌아다녔다고 공치사를 해댔다. 난 그놈을 숨도 못 쉬도록 꽉 안아주면서 정말 고맙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러고도 그놈의 엄마를 향한 선물 세례는 끝나지 않았다. 한 번은 엄마 글 쓸 때 커피나 티를 마시라며 보라색 꽃이 그려진 포트메리* 커피잔세트를 사 오기도 했다. 아이가 가끔씩 요리해 주던알리오리 스파게티의 맛과 데코레이션도, 그야말로 에미의 입이 헤~ 벌어지게 하던 예술이었다. 어느덧 우리는 낯선 나라 호주에서 8년 하고 8개월 7일을 그렇게, 어제보다 깊어지는 뿌리를 내리면서, 우리의 푸른 잎들의 표면적을 조금조금 넓히면서 싱그럽게 키워내고 있었다. 두 누나는 시드니로 가 살고 있었다.자신들의 직장을 따라 집을 떠난 지 각각 1년과 2년이 지난 시기였다. 내 아들은 대학졸업을 두 달 앞두고 있었다. 중간고사기간이었다. 토요일이던 그날아침까지,마지막 리포트 하나만 제출하면 대학공부는 사실상 끝나는 9월의 날이었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봄빛만큼이나 가슴이 따스하고 온 마음이 행복하고 있었다.
이질적인 두 세계를 연결시키고 싶은 주인공의 욕망이 꿈과 환시로 나타났다는 사실은 그 욕망의 강렬함뿐만 아니라 그것의 현실적 불가능성을 동시에 뜻하고 있다. 바로 이 '욕망의 강렬함'과 이 '현실의 불가능성' 때문에 작곡가 사스노프스키가, 시인 고르챠코프가 그리고 타르코프스키가 고통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김용규, 같은 책, <노스탤지어> 편 p.268.
한주를 쉬고 다시 연재글을 올립니다. 사실은 너무 가슴 아픈 스토리여서 주저했습니다만, 연재라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일뿐 아니라 살아가는 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되겠지요. 누군가 그러데요,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과 골프라고요. 바라옵건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하여 그저 담담하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많이 덤덤해졌으니까요. 깊이로 드는 시간엔 아픔도 슬픔도... 감수해야겠지요. 겨울을 지나면 파릇파릇 새순이 싹트겠지요. 늘 건강 행복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