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가 '무의지적(involontaire) 기억'이라고 표현한 '회상'이란 한편으로는 일찍이 아우구스티누스가 언급한 '상기의 힘(Vismemotiare)에 의한 '시간의 병치', 곧 과거나 미래를 현재와 나란히 놓는 작용을 한다. 그래서 하나의 불변하는 통일체 곧 '초자연적 시간'으로 만든다. 이러한 시간은 흘러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시간 안에서 지나간 자기 자신을 '상기' 또는 '회상'함으로써 자신의 불변하는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김용규, 같은 책 <노스탤지어> 편 p.281.
물론 아이의 건강에대한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을 테다. 하지만아이가 8년이 지난 그때서야 언급한,오롯이 묻힌3년의시간을 그제야 내가 깨치게 되었다.내 앞에서 말하던 일목요연한 아이의 담백한 문장에서쓸쓸함이 훅 느껴졌다. 엄마로서 유구무언이었다.내 몸에서온힘이 쑥 빠져나갔다. 날수로 치면 1,095일의긴 시간을아이 혼자 그 쓸쓸한 마음을 꾹 누른 채 있었다니.
호주친구들 속에서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너무나 외롭고 갑갑했었다니.그 외롭고 우울했음이, 아이가 호주친구들하고 잘 어울려 놀아서자랑스러워했고흡족해하였던 엄마의표정이 주원인이었던 것 같았다. 내 속에서 아이에게 미안함을 넘어 죄책감이 소름처럼 돋았다. 동시에 스물한살이나 된 놈이 평생을 홀로 키워놓았더니 엄마에게 모든 걸 덮어 씌우고 있는 느낌, 그 찰나적 감성이 돋았다. 오십 대 중반의 엄마로서 이십 대 초반 막내를 바라보는 미덥지 못한 감정이었을까.
11년 전의 난 그랬다.
아이와 엄마 사이의 수많은 색깔을 띤 인생의 가닥에서 오직 하나, 지에미가 잘못을 저지른 빨간색을 뽑아 들고와서 엄마에게 항의를 닮은 투정을 하는 그놈의 말이 언짢게도 느껴졌다. 아주 짧게 바람처럼 스쳐가던 생각이었지만, 돌아보면 아직 성숙되지 못한 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였고, 부끄럽기 그지없는 엄마의 감정이었다. 아이가 우울증을 실토하기 위하여 그 이전에 얼마나 깊은 생각을 하고 또 하였을지, 미숙했던 이 엄마는 충분히, 아니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으니미안하기 이를 데 없는 못난 인간이었다.
불현듯 정신이 들었다.
도둑처럼 슬그머니 빠져나왔던 아이가 있는 내 방의 안부가 염려되었다.마치 바람빠진 풍선인 듯 넋을 잃은 채, 죄 없는 마른걸레를 들고계단을 닦던 손길을 급작스럽게 거두었다. 그리고고요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도 말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난 그저 아이를 꼭 껴안았다. 엄마, 너무 걱정하지 마. 엄마가 걱정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엄마는 그냥 가만히 있어, 알았지? 하며 내 아들은 지엄마 걱정부터 했다. 내가 할 말을 그놈이 먼저 했다. 아이의 눈빛은 깊은 숙고 끝에 나온, 진지하고 냉철한 어조 그대로 담담함을 담지하고 있었다. 난 그 속에서 왠지 안심이 되었다.
다음날내 아들 앞에 서자 깊은 물속처럼어미의 속내가 흔들렸다. 전선이 지나간 듯 심중이 저릿했다. 그러나 아이의 우울한 마음에 관한 말을 아이 앞에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심지어는 인터넷검색마저도 해보는 게 두려웠다. 가여운 내 아이의 마음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에미라는 사람이 잘못하다가는또 다른 해를 불러들일까 봐 살얼음판처럼 조심스러웠다. 우울함은 죽음과 가깝게 닿아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니, 내 입으로 절대로 그것을 발설하지는 못했다. 당시 지극히 영민한, 한창 예민한 스물 하나의 청년의 마음을 함부로 흠집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모든 병은 소문을 내야 낫는다 했는데, 난 그걸 까맣게 모른 채 있었다.한편으론 내 아들의 병을 지인들이 아는 게 싫었을지도. 정녕 그랬다면 나는 나쁜 엄마가 맞다.
어쨌든 마음속으로는 염려가태산이었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 가지,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였다. 아이를 보는 어미의 마음은 뭐랄까. 계란 껍데기와 흰자 사이에 낀 보드랍기 그지없고 엷디 엷은 막 같은 것. 알밤으로 말하면 보늬, 그것이 흠집 나면 계란 흰자가 어그러질 테니 아이 앞에 선 어미 마음은늘 아슬아슬하였다.
회상! 바로 이것이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법이자 '잃어버린 공간'을 찾는 방법이고, 궁극적으로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방법이다. 김용규, 같은 책 <노스탤지어> 편 p. 282
한주를 쉬고 다시 연재글을 올립니다. 사실은 너무 가슴 아픈 스토리여서 주저했습니다만, 연재라는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일뿐 아니라 살아가는 일이 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되겠지요. 누군가 그러데요, 맘대로 안 되는 게 자식과 골프라고요. 바라옵건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하여 그저 담담하게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도 많이 덤덤해졌으니까요. 깊이로 드는 시간엔 아픔도 슬픔도... 감수해야겠지요. 겨울을 지나면 파릇파릇 새순이 싹트겠지요. 늘 건강 행복하십시오.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