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엘리베이터
오래전 일인데 표정과 목소리에 담긴 본말이 생생하다. 그때의 분위기가 마음에 또렷이 저장된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그 후 그녀들을 만난 횟수보다 책을 읽은 횟수가 더 많았다. 그럼에도, 독서력보다 그녀들 표정과 언어의 위력이 더 세다.
브리즈번에 살 때 일주일에 한 번씩 그녀들을 만났다. 마주 앉아 정담을 나누고 밥을 함께 먹었다. 신앙이 중심이 된 그때 모임은 모닥불 곁처럼 훈훈했었다.
그녀들을 만날 수 있어 외국생활이 외국생활 같지 않았다.
따끈하게 익은 군고구마 맛 같은 그 시간이 귀해서 우리는 가능한 한 그날을 거르지 않았다. 집을 바꿔가며 수요일마다 모였다. 저녁을 같이 해 먹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만들었다. 그녀 두 사람은 내 나이보다 한참 어리지만 오히려 내가 그 두 마음에 감싸 안기는 기분이었다. 박완서 선생이 이해인 수녀를 만났을 때, 푸근히 녹아졌다던 마음이 그랬을까.
지금 나와 동거하는 그녀도 그렇다. 그녀가 엄마인지 딸인지, 내가 엄마인지 딸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한국 텔레비전 프로를 외장하드에다 다운로드해준다. 내가 필요로 하는 앱을 어김없이 내 폰에다 끌어와 붙여준다. 내가 물어보는 잉글리시 텐스를 술술 막힘없이 쏟아낸다. 내가 못하는 전화를 보험회사와 병원에다 걸어 예약해준다.
내가 생각해도 생뚱맞은 걸 물어보면 내가 그걸 어찌 아노, 하고 빙그레 웃는 엄마의 폼을 자기가 한다. 내가 타고 다니는 차가 10년 묵은 고물이 되었다고, 자기가 번 돈으로 새 차를 한 대 뽑아 아낌없이 나를 태우고 바다로 산으로 몰고 다닌다. 그래도 밥은 순번을 정해서 산다.
나보다 한참 젊은 그녀들과 있으면 그냥 해피해진다. 이유는 명백하다. 엄격한 원칙을 색 고운 볼펜처럼 마음에 품고 있어서다. 타자를 수용하고 허용하며,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의 펜, 타자를 자신처럼 아끼는 가슴을 그녀들은 보물처럼 지니고 있다.
그녀들의 그런 속내를 나는 잘 안다. 그녀들이 꺼내놓던 언어와 표정을 내가 읽었고 꽤 오래 느껴왔기 때문이다. 그녀들을 만나던 중간에도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같이 깊이 있고 디테일하고, 육중하고 난해하며, 고차원적인 독서력을 키워나갔다. 지식은 외우려 애썼고 그녀들의 언어는 공기처럼 쉽게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 내 속에 각인된 내용은 그녀들의 표정과 언어의 기운이다. 책 속 지식이 아니라. 풀기 어렵게 맺힌 이야기도 그녀들은 수월하게 휴지뭉치처럼 술술 잘 풀어놓는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미투 운동이 인터넷에 뜨고 있다. 구중궁궐 거대 담장 속 권력의 게이트가, 여인들의 입으로 열리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역만리 호주까지 실시간으로 와 닿는 희한한 세상을 산다. 아침에 눈 뜨면 참 요상한 문이 빠끔 열려 있다. 풍문으로 들을 것 같은 일이, 뉴스에 뜨는 세상이다.
문학계의 괴물과 연극계, 정치계…, 거물이 괴물이 되었다가, 괴물인지 거물인지 모르다가, 그래서 법정으로 가져가서 괴물인지 거물인지를…, 나 혼자 얼굴이 붉어졌다 식어졌다 황당하다가 냉철해지다가…. 그만 뉴스의 앱을 닫는다. 그리고 대략 난감한 상상을 한다.
그들은 옷을 벗었는가. 아니 옷을 벗을까.
다시 옷을 입을까. 아니 옷을 갈아입을까.
나는 누구의 편은 아니다. 다만 옷을 벗든 입든 제발, 그들이 살아있길 바란다. 잘잘못을 엄중히 가리어 인정할 건 명백히 인정하고 용서를 빌 것은 겸허히 빌기를 바란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길 바란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와글와글하는 이 와중에, 몇 년 전부터 만나오던 그녀들의 언어와 표정이 내 마음에서 뜬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괴물이라 칭함을 받은 그들의 표정이나 언어를 덮어 버리고, 내 기억력을 그녀들이 톡톡 터치한다.
먼저 S 엄마의 웃음기 가득한 표정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뜬다.
어느 날 S네 4학년 교실에 장애우 한 명이 전학을 왔다. 학교에선 교실 근처에다 그 단 한 명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고 휠체어 전용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선 전학 온 한 사람의 장애우, 그의 부모님을 모시고 와서 교장 선생이 엘리베이터 전용키를 전달한다. 그게 다가 아니다. 그 장애우를 도와주려는 수많은 반 친구들이, 희고 고운 고사리 손을 들고 나섰다. 불편한 학우를 도와주려는 어린 손길이 넘쳐났다. 담임선생은 학생들에게 순번을 고르게 했다. 휠체어를 밀어주려 번호표를 쥔 학생들은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들어주고 그 학우랑 같이 웃고 함께 울던 때를.
희고 고운 고사리 손이 쥔 손들의 이미지는 스러지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지금도 웃고 있을 거다.
그때 수많은 마음에다 미소를 한밭 가득 심어두었으니까.
그 가슴꽃은 특별한 꽃이어서, 누군가의 가슴에서 수시로 피어날 것이다.
제삼자인 나도 S 엄마, 그때 그녀의 언어 속에 들었던 의미를 되새겨본다. S네 학교 당국의 허용과 포용, 그리고 배려는 그 학교의 전교생들이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일임을. 단순히 엘리베이터의 딱딱한 물질성과 금속성의 공급이 아니었음을. 그 장애우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결코 가벼운 연민은 아니었다는 것을. 실천하는 교육의 진정성이 그 안에 제대로 내재되어 있었음을 이제야, 증명할 수 있음을, 그 당시의 훈훈했던 어린 꽃들의 해맑은 기운이 내 마음밭에서 소곤거리고 있었다.
교육은 리얼리티고 팩트다.
돈의 가치를 뛰어넘는다.
편익은 물론, 관심과 사랑에 훈훈했던 장애우 가족의 표정은 강력했다. 장애우만 그랬을까. 아니다. 전교생이 행복했다. 고사리 손들이 요정처럼 나와 장애우를 스스럼없이 돕던 분위기를 상상해보면, 그 훈훈한 속내가 충분히 전이된다.
마음은 나무처럼 커가고 행복은 바이러스처럼 번진다. 서로서로 돕는 분위기는 종소리처럼 퍼진다. 행복은 받아본 사람만이 행복을 타자에게 돌려줄 수 있다.
교육은 물질을 투자하는 것인가.
아니다. 마음을 투자하는 것이다.
힘없는 약자에게 힘의 저력을 심어주었다던, 그날 S 엄마의 표정과 언어를 상상하다니 내 마음이 다시 따끈히 데워진다. 불편하고 아픈 곳을 감싸 안아 준 그들의 행복이 행복하다. 괜히.
S 엄마의 화면을 닫는다.
* 2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