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적인 별리를 아직은 소화해내지 못한 한 속내와 운명 사이, 그 불화의 속내를 채우는 풍경이 있었다.
검은 밤하늘에 뜬 초닷새의 달과, 하얗게 제 몸을 부숴 칠흑 같은 바다를 뒤척이는 흰 이빨의 파도, 어둠을 속절없이 깨뜨려 유리빛으로 반짝이는 별동네가 나의 부족함과 우매까지 끌여들여 한장의 그림으로 이어놓은 풍경이었다.
까만 어둠 속에서도 먼 나라의 다채로운 장소를 파노라마로 펼치는 환상곡, 이 곡의 매개체는 무엇이던가.
부드러운 바람인가.
유선으로 떨어지는 유성인가.
은은히 차오는 달의 중력인가.
우리 살빛 다른 쉰 명의 사람들은 발자국 소리를 조심스럽게 떼어 놓으면서, 줄을 지어 안내하는 백인 할아버지를 따라가고 있었다. 가끔 개별적으로 고개를 젖혀 눈빛을 별빛과 잇는 이도 보였다. 풍경과의 만남과 감동 사이에 낀 나의 헛것 같은 욕망은 바람과 별과 달과 파도소리에 녹아서, 마치 살바드로 달리의 시계처럼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까만 바닷가로부터 야생 거북이가 불빛을 향하여 바다와 뭍을 잇는 선을 선명히 새기면서 엉금엉금 기어 나오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한국에서 관광을 온 한 사람이 대뜸 말한다. "이건 쇼네”라고.
나는 대자연 속의 자연이 들을까 봐 못 들은 체하고 있었다. 그는 또 말했다. 쇼, 쇼라고.
그의 목소리는 자꾸만 깜빡거리는 별처럼, 아니 네온 샤인 같은 느낌으로 사람이 만들어 놓은 쇼, 쇼, 쇼라고 연발을 한다. 나는 그분의 입을 가로 막는 대신 내 귀를 틀어 막았다. 그의 곁에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백인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야생 거북이는 땅을 파서 알을 낳으면 다시 바다로 떠난다. 6주 후 즈음에 땅이 보글보글 끓듯이 솟으며 새끼 거북이가 오물오물 빠끔한 눈을 뜨고 깨어난다.
갓난아기가 젖을 빠듯이, 아기 손만 한 베이비 거북이들은 낮은 기울기를 따라 제가 살아갈 바다를 찾아 바다로 헤엄쳐 들어간다. 그것은 생래적으로 그들이 갖고 난 본능이다.
알을 낳고 바다로 돌아가는 거북, 그리고 거룩한 몸 자국
'쇼’라고 한 그분의 말은 내 마음을 툭 건드렸다.
호주와 한국 사이의 문화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했다.
우선, 풍경이 인간과 다른 건 무엇일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自然. 따지지 않는 자연. 뜨고 지고 차고 기우는 시간관리가 사람보다 엄중하고 썩으면 썩은 대로 흠집 나면 흠집 그대로 민얼굴을 들이미는. 이에 비해 인간은 화장을 하고, 눈과 코와 가슴과 턱을 깎고 덧이어 고친다는 것.
풍경에 든 시간에도, 인간의 습성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에 고립된다는 것.
두 번째, 한국인과 호주 사람은 뭐가 다를까. 호주의 이력서에는 인물사진 난이 없다는 것. 우체국을 가 봐도 호주 여직원들은 주근깨와 주름살 진 맨얼굴 그대로도 출근한다는 것. 즉 한국인이 외모에 더 치중한다는 것.
결론, 조금은 인위적인 한국 풍경과 천연 자연 그대로를 담은 호주 풍경, 그 서로 다른 환경 속에서 각기 환경을 따라 국민성이 싹틀 수도 있다는 점. 호주의 풍경은 자연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 많으며 한국의 산야는 깎고 세우고 뚫는다는 점. 이처럼 사람의 모습도 성형하는 이가 늘어간다는 점.
이처럼 이질적인 양국의 문화 속에는 분명, 장단점이 들어 있다는 점. 서로가 이질적인 면을 들여다본다면 그 다른 모습들이 신기하거나 흥미롭거나 신선하다는 점. 때론,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기도 하다는 점. 어떤 때는 내 것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도 든다는 점. 호주의 자연 그대로 두는 건 때로 방치로도 이해 된다는 점. 그리고 예술적 감각과 열정과 심미안은 한국이 우월하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쇼쇼라고 자연 산란을 의심부터 한 그 한국관광객의 독언에 나는, 마음이 공허하다는 점. 얼마나 속거나 속이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여 왔으면? 그런 말이 자신도 모르게, 이역만리 바닷가의 신성한 장소에서, 트림처럼 크르륵 흘러나왔는지. 쇼. 주워 담지 못할 그 한 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