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톰과 노라
성경공부 리더, 톰은
일흔여섯 살이다.
서양인치곤 165센티 정도의 작고 좀 마른 체격인 그는 첫인상부터 인자했다. 브레이크 타임이 되면 조용히 일어나 케이크를 자르고 커피를 손수 타서 멤버들 테이블 앞에 씨익 웃으며 하나씩 올려주곤 한다.
여덟 명이 문답식으로 공부를 하는데, 가장 쉬운 질문은 남겨두었다가 내게 묻는다. 그때도 톰은 한번 씨익 웃어주었는데 그건 이국의 삶에서 힘내라는 응원의 시그널이었다. 나는 톰의 그 수줍은 듯 겸손한 미소가 좋았다. 내 속에 든 대답 거리가 궁색해도, 영어를 잘 못 알아들어도 창피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처럼 톰이 상대를 섬기고 배려하여 마음을 편하게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톰의 아내 노라 할머니는 늘 톰 옆에 바짝 앉아있었는데, 노라는 톰보다 더 자주, 더 온유하게 웃곤 했었다. 그런 노라 옆에 있다 보면 그녀의 숨에서 가랑가랑 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섞여서 흘러나왔다. 천식이라 했다
나만 몰랐을까.
그녀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 난 그녀가 심각한 병을 달고 있던 걸 알지 못했다. 그저 톰이 이뻐하고 행복했던 여인으로만 기억된다. 그녀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생글생글 웃었다. 나 보고도 웃고,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그리 잘 웃었다. 그녀를 상기하면 선하게 웃는 모습만 떠오른다.
어느 날 노라의 얼굴에서 분홍색 제라늄 꽃이 피듯 함박 웃는 표정을 보며 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예쁜 얼굴은 아니어도, 얼굴이 늘 웃고 있으면 저렇게, 예쁜 게 표정에 배어나는구나', 하고.
그런데, 내가 번다버그를 떠나 있던 사이,
노라가 천국을 가셨단다.
어느 날 노라가 나보고 저녁을 먹고 왔는지 안부를 물을 때, 톰이 장난을 치던 일이 생각난다.
톰은 슬그머니 자신의 한 손을 노라의 콧등으로 가져가서는, 그녀의 코끝을 살짝 쥐었다 놓아주는, 마치 영화에서 열애 중인 남녀가 자기들끼리 하는 그런 장난을 예사롭게 치곤 했다.
《아가서》의 '사랑하는 자'에게서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의 구절을 톰 할아버지는 노라 할머니에게 스스럼없이 행동으로 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노부부의 자연스럽던 그런 모습도 따스하고 참 좋았다. 내 나라에선 한 번도 못 봤던 이색적인 풍경이었는데도, 고향의 봄빛처럼 포근하게 다가왔다.
그때마다 나도 가락을 맞추듯 생긋생긋 웃곤 했었다. 씨익 웃음을 띤 톰은 내게 얼굴을 돌려서 후렴구처럼 말했다. 노라가 말을 잘 못 알아들어. 귀가 어두워.라고. 그럴 때도 노라가 웃기만 한 걸 보면 노라의 귀가 어둡긴 했던 것 같다.
노라가 천국을 간, 노라가 사라진 성경공부반에 처음 갈 때, 나는 김밥을 많이 말아갔다. 한 끼라도, 톰 할아버지의 밥을, 그렇게라도 챙겨 드리고 싶었다. 도시락에 따로 하나 더 포장하여 갔다가 공부를 마치고 톰에게 의사를 물어본 후, 톰의 손에다 알록달록 속이 든 코리언 김밥을 들려주었다.
입술은 웃고 있지만 표정에 풀기가 없어진 톰을 보니 가슴이 찡했다. 교회에서 만나도 톰은 힘이 없어 보여서,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날, 톰 옆에 미색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홀로 계시니 딸이 와서 식사도 챙겨드리고, 보살펴 드리러 왔나 보다 하고 나는 반색을 하며 인사를 했다.
"하이, 톰, 따님이 왔나 봐요?"
"홍, 나랑 결혼할 사람이야. 마리아."
"아아, 어, 그러시군요. 축하해요."
나는 괜히 좀 머쓱해서 스르르 꼬리를 감추고 집에 왔다.
그렇게 노라가 떠나고 4개월 안에 톰은 재혼을 했다. 톰의 웃음에 기운이 좀 도는 것도 같았다.
그래도 나는 톰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노라가 있을 때와 별개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톰은 왜 그리 서두르듯 재혼했을까.
애도의 기간을 뉴 와이프와 함께 의연히 견디어 보려고 그리도 빨리, 새 여인을 들였을까. 마음씨 좋은 노라가 그리하라며 유언을 남기고 떠났을까. 아닌 자유분방한 서양문화?
아니다. 영화《인턴》의 벤 할아버지도 있다.
이처럼 삶의 모습이 다 다르니, 톰의 고귀한 삶을 존중해드려야 겠다.
타인에게 폐가 되지 않으면 일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이들의 삶에 동화되어 간다.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