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도 나를 본다
우리 학원은 주 5회 수업이 기본이다. 학생에 따라서 주 1회부터 4회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매일 학원에 와서 한 시간 수업을 한다. 60분 중에서 피아노 연습은 40분, 이론은 20분 정도로 분배되어 있다. 이 역시 학생에 따라서 5분이나 10분 정도 실기와 이론의 비율이 달라지기도 한다.
주 5일 수업 중에서 수요일은 '수요 특강'을 진행한다. 이때에는 피아노 연습 외에 다른 음악 활동을 한다. 작곡, 작사 같은 특별 활동이나 리코더, 오카리나, 칼림바, 드럼 등 다른 악기를 배우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음악과 함께 그림 동화책을 읽거나 계절에 맞는 동요를 배워 부르기도 한다. 음악에 맞춰 리듬 치기 및 몸동작 하기 등 퍼포먼스 활동을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학원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특별 활동은 역시 '자유 연습'이다.
'자유 연습'날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수업 시간 동안 마음껏 연주할 수 있다. 재미없는 하농이나 골치 아픈 체르니는 미뤄두고, 재즈 소곡집이나 뉴에이지 연주곡을 페달을 밟으며 속도를 올려 제멋대로 쳐도 혼나지 않는 날이다. 하기 싫은 곡은 연습하지 않아도 되고, 한 곡만 무한정 연습해도 좋고, 예전에 잘 쳤던 쉬운 곡을 꺼내서 다시 연습해도 상관없다. '그건 그만 치고 새로 배운 곡 연습해야지'라는 선생님의 잔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자유의 날. 게다가 선생님의 레슨이 없다는 장점(?)이 있으니, 수요일은 그 어느 때보다 어린이들이 기다리는 날이다.
"선생님, 게임하면 안 돼요?"
"무슨 게임?"
"단체로 편 먹고 하는 거요. 개인전 말고 팀(team)전 해요!"
'보찾사'라는 이름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론 게임이 있다. 일종의 도블 게임이다. 각자 손에 카드를 한 장씩 쥔다. 가지런히 쌓아놓은 카드 더미에서 한 장을 뽑아 뒤집는다. 뒤집은 카드 앞면에 내가 가진 카드와 같은 음악 기호가 있을 때, 이름을 외치면서 그 카드를 가져간다. 아직 배우지 않았거나 이름을 모르는 음악기호는 손가락으로 재빨리 짚으면서 가져갈 수 있다. '(눈으로)보고 찾는 사람들'이라는 게임 이름을 줄여서 '보찾사'라고 하는데 순발력과 지능(?)이 모두 필요한 인기 게임이다.
"게임이 그렇게 좋아?"
"네! 학교에서는 아예 게임을 못해요."
"왜? 쉬는 시간에 하면 되잖아."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 갔다 오고 책만 읽으래요."
3학년 유늬가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약한 어른들 같으니'라고 생각하며 웃는다. 코로나를 조심해야 하니 삼삼오오 모여있지 말고 쉬는 시간에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책만 읽어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선생님. 책상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야유하는 학생들. 지도 선생님의 말투와 목소리가 어땠을지, 학생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와 교실 분위기가 어땠을지 눈에 선하다고 해야 할까.
"수업시간에도 책 보는데 쉬는 시간까지 책을? 쉬는 시간에는 놀아야지."
"못 놀게 해요. 코로나 때문에요. 선생님이 아이들끼리 모여있으면 막 떨어지라고 그래요. 특히 3반 선생님은 진짜 싫어요. '야, 야! 너희들 다 떨어져! 모여서 장난치지 마!'그래요. 그냥 이야기만 하는 건데."
"그렇구나. 거리두기 해야 되니까 어쩔 수 없지. 혹시 여럿이 모여있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린이들도 억울하겠지만 학교 선생님의 고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학원 성인 수강생 중에 현직 초등교사로 일하시는 분도 계시고, 교직에 있는 친한 친구가 있어서 공교육 현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황인지 주워들은 내용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안 되는 걸 학원 와서 하려고 하지 마. 나는 단체게임을 하자고 조르는 어린이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유늬가 흥분해서 외친다.
"그런데 코로나가 사람이 모여있다고 자연 발생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지. 감염된 사람이랑 가까이 있다가 전파되는 거지."
"마스크 끼고 서로 안 만지고 그냥 이야기만 하는 건데. 3반 선생님이 제일 심해요. 아무것도 안 했는데 무조건 떨어지라고 해요. 진짜 짜증 나요."
"그래도 무증상 감염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또 몸을 많이 움직이다 보면 마스크가 들떠서 코에 간격이 생길 때가 있잖아? 그 사이로 바이러스가 훅 들어와서 내 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종종 친구들에게 들었던 핀잔이 생각났다. 넌 공감할 줄은 모르고 자꾸 해결책을 제시하냐. 유늬 이야기를 듣다 보니 또 그 몹쓸 버릇이 나오는 것 같다. 이럴 땐 이성적으로 대꾸할 게 아니라 맞장구를 치면서 '모여서 장난치는 게 아니라 그냥 이야기만 했을 뿐인데'라고 억울해하는 유늬의 마음에 공감을 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애들끼리 계속 모여있으면 '주의'를 하나 받거든요? '주의'를 두 개 받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어떻게 되는데?"
"수업 마치고 교실에 남아야 돼요! 진짜 최악이에요."
나는 흥분 상태로 긴 문장을 쉼 없이 뱉어내는 유늬를 보며 귀엽다고 생각했지만, 그 마음이 들키지 않게 눈썹을 찌푸리면서 같이 화를 내주었다. 세상에. 학교 마치고 남으라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 제 말이요! 너무했네, 너무했어. 코로나가 잘못했네!
"그런데요, 3반 선생님이 좋은 점이 딱 한 가지 있어요."
함께 열심히 흉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유늬가 목소리를 차분하게 바꾸면서 말했다.
"뭔데?"
"우리들한테 칭찬을 많이 해주세요."
어라라.
아이들을 오해하고, 아이들 말을 끝까지 들어주지도 않고,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보는 '짜증 나는' 3반 선생님의 딱 좋은 점 한 가지. 칭찬을 많이 해준다.
어린이들이 느끼는 칭찬이란 무엇일까. 칭찬이라는 것은 단순히 '잘했어'라고 인정해 주는 말 뿐인 것은 아니다. 칭찬을 하려면 상대방을 잘 관찰해야 한다. 어린이의 작은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면 칭찬할 거리가 보인다. 칭찬 속에는 관심, 사랑, 격려가 들어있다. 그래서 칭찬받는 사람은 관심과 사랑, 격려를 받는다는 기분을 느끼며 행복해진다. 이 행동이 왜 칭찬받을 만한 일인지, 이 칭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칭찬은 자신감을 주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북돋아 준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뿐 아니라 행동에 담긴 속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깊은 이해심을 가진 사람만이 바른 칭찬이 가능하다. 어떤 칭찬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나는 진심 어린 칭찬이 아니면 칭찬을 하지 않는 편이다. 학생이 뭘 하든지 '응 잘했어', '와 대단하다' 하고 격려하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붙은 선생님도 있다. 뭐랄까, 그런 성의 없는 칭찬을 하면 어린이들도 그 마음을 고스란히 느낀다고 생각해서, 나는 되도록이면 영혼 없는 칭찬의 말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내 칭찬을 듣는 어린이들이 특히나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다. 칭찬에 인색한 선생님께 듣는 칭찬이란 얼마나 희귀한 것인가. 하지만 칭찬을 자주 한다고 해서 그 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듯, 이제는 칭찬하는 것에 너무 인색하지 않으려고 한다. 칭찬 한 번에 거대한 의미와 무게를 싣지 않고, 그날 그 시간에 그 사람에게 집중한 진짜 칭찬은 횟수가 반복되어도 지겹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짐작이지만, 3반 선생님도 빈말로 칭찬해 주는 성격은 아닌 것 같다. 그런 호락호락하지 않은 선생님의 칭찬은 어린이들의 어깨를 으쓱하게 올려주는 특별한 선물이다. 3반 선생님의 칭찬에는 진실함과 공정함이 있을 것이다. 때로는 어린이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단정해버리는 야속한 어른이지만, 어린이들이 잘한 것에 대해서는 인색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좋은 선생님. 자주, 진심으로 어린이들을 격려해주는 선생님의 그런 면모는 장점이라고, 비록 미워하는 선생님이지만 유늬도 날카롭게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3반 선생님은 칭찬을 많이 해준다'라는 말도 선생님을 향한 유늬의 칭찬이다. '짜증 나는 선생님의 칭찬 따위 필요 없어'가 아니라, 칭찬을 해주는 점이 그 선생님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큰 매력으로 평가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새삼, 어린이들에게 칭찬이란 건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구나 느꼈다.
지금 운영하는 학원을 개원하기 전 일했던 곳에서 원장님께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자신이 카리스마 있다고 생각해요?"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카리스마까지는 모르겠지만 학생들이 저를 엄격하고 무섭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내가 그렇게 대답하자 원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완전 아니란 거 알아요? 애들이 김선생님을 제일 만만하게 봐요."
"네?"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니에요. 무섭게 보이고 싶은 선생님한테 맞춰주는 것뿐이에요."
나름 레슨 경력도 쌓이고 아이들을 다루는데도 능숙하다고 생각했지만, 더 연륜이 있었던 원장님 눈에는 내가 어설픈 호랑이 선생님처럼 보였을 것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선생님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물렁하고 유약한 살쾡이인 것을 숨길 수 없는 내 천성이 어린이들 눈에도 빤히 보였을 것이다. 온몸이 간지러운 표현이지만, 학생들도 내가 그들에게 쏟는 노력과 진심을 느끼고 인정했기 때문에, 나의 부족한 면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었던 것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나를 향한 애정과 너그러움으로 내 역할 놀음에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어린이들은 학원에서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또래 집단에 있으면 더 상스러운 말, 골라지지 않은 험한 말도 불쑥해버리는 게 요즘 어린이들이다. 유튜브나 TV 같은 미디어에서, 주변 상급생들에게서, 부모와 친척 어른에게서 듣고 배운 비속어를 선생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 자제한다.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지금은 선생님께 배우러 온 학생이라서, 그 역할에 충실하느라 나쁜 말을 참는 것이다. 가끔 어떤 공간에 어린이끼리만 두고 이론 문제를 풀게 하거나 자체적으로 게임을 하게 놔두는 때가 있다. 멀찍이 숨어서 지켜보면, 내가 그 공간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거친 표현들을 엿들으며 마음속으로는 놀라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들 앞에 나타난다. 나 역시도 어린이들 앞에서 선생님 역할을 수행할 때의 모습과 친구들과 수다를 떨 때의 모습이 같지 않으니까.
내가 어린이들을 보는 만큼 그들도 나를 본다. 선생님 역할을 하고 있는 나를 의식하고, 나를 관찰하고, 나에게 맞춰주고 있다. 내가 들이는 에너지만큼 더 많은 수고를 들여 선생님인 나를 상대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이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처럼,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님 역할을 하는 어른을 받아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놀아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어른과 놀아주고 있는 어린이들.
어린이들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한다. 그들은 공정하고 예리하며, 애를 쓰고 진심을 준다. 그 착한 마음에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른다. 어린이는 나를 겸허하게 하고 성찰하게 한다. 사랑과 격려를 담은 배를 이끌고 그들의 마음 한가운데로 헤엄쳐 가고 싶다. 그들의 한 순간을 행복하게 하는 긍정과 자신감의 작은 파도를 일으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