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한 번은
“6월에 백신을 맞기로 했어요.”
“오! 잘됐어요!”
“그래서 유언을 남기기로 했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언제든 죽을 수 있어요. 백신을 맞고 죽을 확률보다 다른 일로 죽을 확률이 더 높아요.”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 안드레스와 청담동의 조용한, 담이 높은 부잣집 골목을 걸었다. 1년 남짓 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커피 가게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나오는 길이다. 커피 레몬 슬러시와 에스프레소를 각자 한 잔씩 마셨다. 무척 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기분 좋게 걸어가다 뜬금없이 유언이라니. 워낙 오랫동안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튀는 이야기를 들어왔던터라 안드레스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죠. 확률로 따지면 지금 바로 죽을 수도 있고, 내일 죽을 수도 있는거죠. 어떻게 죽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요. 그렇지만 백신 주사는 ‘죽을 수도 있다’는 확률에 내 의지가 들어갔다는 점이 중요해요.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더 강렬하게 하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곁의 사람들에게 말을 남기고 싶어요.”
“…….”
“그래서 유언장에는 조카에게는 무엇을 남기고, 덕메님들에게는 방탄소년단 굿즈를 남기고, 동생에게는 아파트를 팔아서 내 빚을 갚으라고 하고, 통장은 몇 개가 있고, 뭐 이런 걸 써 놓으려고 해요.”
“오! 그럼 나도 유언장에 넣어줘요.”
“안드레스는 뭐 갖고 싶어요?”
“아무거나.”
하하, 웃으며 길을 걸었다.
안다. 남기는 말이라니.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안드레스한테 했던 말처럼 백신을 맞는 건 내가 선택한 확률이다. 죽을 수도 있다는 확률. 심지어 내가 언제 죽을 수도 있는지 날짜까지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말을 남기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어느 해부터, 사는 게 너무 힘들어졌다. 깊은 우울에 빠져 바닥을 차고 올라오고 나서부터, 삶이란,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 자꾸만 들여다봤다. 징징거림, 나 살기 힘들다고, 그런데 태어났으니 살아야 한다고, 곁에 사람들에게 징징거렸다. 나를 일으켜 살아가게 하는 음악, 책, 영화, 여행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살아갔다.
가끔 삶의 끝을 꿈꿨다. 이대로 다 끝이 났으면, 아침에 눈을 뜨지 않으면 끝일텐데, 그랬으면 좋겠다, 사는게 너무 지겹다……. 어머니가 듣는다면 등짝을 후려갈길 생각을 품고 살았다. 때때로 행복하고, 대부분 외로웠다. 외롭다는 말보다, 고독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곁에 좋은 사람들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엔 혼자라는 점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끔은 엉엉, 큰소리를 내어 울었다. 불도 켜지 않은 방에서 갑자기 눈물이 터져서 소리 내어 우는 나를 보며, 달봉이는 가만히 손을 핥아주곤 했다. 그런 밤에 달봉이가 곁에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징징거림, 그 한편으로는 ‘죽기 싫다’, ‘죽음이 두렵다’는 말도 숨어있다. 사는 게 지겹고 힘들어도, 죽음을 떠올리면 두려운 것은 본능일테지. 무엇보다 가족과의 헤어짐이 두렵다. 해를 거듭할수록, 묵묵히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어른들이 우러러 보인다.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어르신도 있지만, 입으로는 그런 말을 해도 하루하루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간다는 것을 안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앞으로 남은 날들을 헤아려보곤 한다.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그 날들을. 지겹다고 생각했다가도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를 여행하는 꿈을 꾼다. 다 때려치우고 싶다가도 반 아이들과 초록색 똥 눈 이야기를 하며 깔깔 웃는다.
아침 일찍 학교에 와서 한글 문서를 눌렀다. 하얀색 종이를 마주하고 글을 써 내려가는데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기는 말을 쓰려니 마음이 울렁거렸다. 쉬이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우는 모습을 어린이들에게 들켰다.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린이들을 보고 눈물이 쏙 들어가긴 했지만. 사실 눈물은 아침에 출근하면서부터 흘렸는데, 마음 속에 감정이 고이고 고여서 터져 나왔다. 지난주에 회원글쓰기로 ‘남기는 말’을 쓰기로 했을 때부터 어떻게 글을 쓸지 생각했다. 마음 속으로 문장을 썼다 지웠다 했다. 살짝 기분이 가라앉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는데 요즘 푹 빠져있는 Coldplay의 새로운 노래-Higher Power의 가사를 곱씹으며 듣다가 눈물이 푹, 나와버렸다.
I`m happy that I`m alive.
살아 있어 행복해
Happy I`m alive at the same time.
살아 있어 행복해, 너와 같은 시간에
When for so long I`d been down on my knees
너무 오랫동안 나 무릎 꿇고 있던
Then your love song saved me over and over
그때 네 사랑 노래가 몇 번이고 날 구했어
For so long I`d been down on my knees
너무 오랫동안 나 무릎 꿇고 있던
Til your love song floats me on.
너의 사랑노래가 날 일으킬 때까지.
‘살아 있어서 행복해.’라고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은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나약할까. 조금의 슬픔과 우울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인걸까. 뭐가 이렇게 힘들까. 다른 사람들도 다 나처럼 살아가는걸까. 하루하루 일으키고 살아가고, 일으키고 살아가고. 얼마 전에 박완서 작가의 수필을 모아놓은 책을 읽어보니 그 분도 그렇게 살았더라마는. 사람 사는 게 다 똑같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 거겠지.
이렇게 징징거리며 살아가는 나를 받아줘서 고마워요. 잘 살고 있는 그대들의 잔잔한 호수에 자꾸만 돌멩이를 던지는 나를 토닥여줘서 고마워요. 앞으로의 삶에서 가끔씩 나를 기억해주면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돌멩이를 던지던 녀석이 있었지, 하고. 살아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덧: 내 동생. 아파트 빚을 갚지 못하고 떠나는 언니를 이해해줘. 귀찮은 일이지만 아파트를 팔면 빚을 갚을 수 있을거야. 조카에게 멋진 이모가 되고 싶었는데, 너무 빨리 떠나버렸네. 내가 만든 그림책은 파일로 외장하드에 저장해놓았으니 언제든지 읽어줘. 안방에 책은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나누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오랫동안 아껴온 책들이거든.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워. <드래곤라자>, <해리포터> 시리즈, 로알드 달 영어책은 너가 챙겨라. 그림책도 아들 읽어주고 싶은 거 있으면 먼저 챙겨. 나머지는 내 친구들이 가져갈거야. <몬스터> 만화책을 비롯한 다른 만화책도 챙겨. 부엌 그릇은 예쁜 것만 가져가. 나머지는 다 버려. 옷도 너가 입을 거 있으면 입어. 죽은 사람 옷이 꺼림칙하다는 거, 그거 다 미신인 것 같아. 죽으면 다 그만인데 뭐 내가 귀신이 돼서 나타나겠니? 그리고 동생이 입는 건데, 뭐가 불만이겠어. 달봉이랑 조카랑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
도현아. 이모가 너무 짧게 곁에 있어서 미안하네. 엄마 뱃 속에 네가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모는 정말 행복했어. 너를 만날 생각에 가슴 설렜지. 막상 너를 만났을 때는 좀 얼떨떨 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까 너는 정말 귀한 아이더라. 무엇보다 정말 귀여워! 부모님과 함께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바래. 동생아, 너는 오래오래 건강해서 부모님이랑 막내랑 잘 보살펴. 먼저 가서 미안해. 좋은 언니였나 모르겠다. 안녕.
엄마, 아빠.
나이 마흔을 먹어도 어머니, 아버지보다는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게 편하네요. 자식은 어쩔 수 없나봐요. 백신 때문에 쓰긴 하지만 유언장은 언젠가부터 꼭 쓰고 싶었어요. 삶에 미련이 많아서 그런가봐요. 하하. 낳아주시고 길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행복했어요. 아시잖아요. 제가 살아 온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셨으니까. 즐겁고 행복한 순간이 넘치는 삶이었습니다. 제게 삶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규영아. 건강하게 오래 오래 부모님 곁에 함께 해라. 누나 소원이야. 알았지? 노래를 좋아하는 우리 규영이. 누나는 규영이랑 피렌체에서 아바 노래 불렀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웃음이 나와. 사랑해. (2021.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