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스(이수안, 문학동네, 2023)>
이야기가 조금 이상하게 흐른다고 느낀 건 소설 중반부가 지나서였다.
사고가 일어났고 유영이 다쳤다. 유영을 다치게 한 범인이 누구일까? 추리소설이라면 응당 범인을 찾아야 하는데, 이 소설은 범인이 아닌 시드 문구를 찾는다. 김 회장은 해외에 비자금을 감춰두었고, 비밀 번호인 시드 문구 중 하나만 자신이 갖고 나머지를 유영에게 주었다. 수술실에 들어간 유영이 살 수 있을지, 산다 해도 예전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김 회장은 지체 없이 유영과 가까웠던 준희와 사고 현장에 있던 인성을 불러 시드 문구를 찾아오라 지시한다. 사람이 죽어가는 마당에 돈이 중요한 건가? 김 회장은 유영의 아버지였다. 그렇기에 이 소설이 인간이 지닌 돈과 성공에 대한 욕망을 담아내는 듯 보였고, 차가운 날씨에 생기는 <블랙 아이스>처럼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시드 문구를 쫓다 보면 유영을 저렇게 만든 범인이 나올 것이다. 범인이 노린 건 김 회장의 비자금이기 때문에 시드 문구를 빼앗을 목적으로 유영을 공격했을 테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고 하지만, 추리의 방향이 ‘범인’이 아닌 ‘시드 문구’가 되자 이야기의 결이 달라졌다. 막상 밝혀진 범인의 정체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식상했고 초라했다. 범죄가 그렇다. 납득할만한 이유와 용납될 상황은 없다. 만약 범인을 쫓았다면 독자를 설득할만한 서사를 쌓아야 했을 테고, 그렇게 덩치만 커진 이야기를 매듭짓기 쉽지 않았을 테다. 범죄의 의도가 아닌, ‘시드 문구’라는 또 다른 숨겨진 상황을 설정하여, 비밀을 만든 이유, 비밀을 나눈 이유, 비밀을 찾는 이유를 쫓게 함으로 소설 속 인물들이 가진 서사를 풀어내고 궁극적으로 사람을 향한 이해를 갖게 했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인생 철칙을 가진 김 회장이 나머지 문구를 유영에게 준 이유는 김 회장에게 유영은 믿고 말고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비자금을 유영에게 줄 생각이었다. 물론 그런 성정의 아이도 아니었지만, 김 회장의 생각을 모르는 유영이 백번 양보해서 김 회장이 가진 시드 문구를 알아내 돈을 가져간다 해도, 김 회장의 입장에서는 돈이 원래 주인에게 간 것이기에 배신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김 회장에게 유영은 배신을 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굉장한 믿음과 애정을 주고받은 사이처럼 보이지만, 두 사람 사이 깊은 골이 존재한다. 잘못 잠근 단추는 전부 풀어서 다시 잠가야 하겠지만 그럴 수 없다고 해서 계속해서 잘못 끼우는 것도 어리석은 듯하다. 유영은 김 회장이 잘못 잠근 단추 중 가장 큰 단추였을지 몰라도, 이후부터 잠긴 단추는 유영에 의해 조금씩 알맞은 위치에서 잠겨진다. 믿음을 주고받는 일이나 상처가 치유되는 ‘회복’이 일어나려면 사랑과 희생이 필요하다 생각한다. 유영이 보여준 믿음이 곧 희생이었고, 사랑이었다.
촌스러운 사람인지라 해피엔딩은 아니라도, 한 줄기 빛이라도 비치는 결말을 좋아한다. 다행히도 점점 알게 된 인물들이 가진 진심은 따스한 색을 띠고 있었다. 이야기가 진짜로 찾아내길 바랐던 건 범인도, 시드 문구도 아닌 자신도 모르고 놓치고 사는 서로를 향한 진심이 아니었을까. 내게 딱 맞는 엔딩이다. 소설을 다 읽고 나니 구불구불한 길을 쉬지 않고 달린 기분이 든다. 아무래도 자동차를 소재로 자동차와 운전, 경주에 빗대어 풀어냈기 때문인 듯하다(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흥미로울 소설이다). 끝까지 잘 달린 기분 좋은 안도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