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 그리고 가터벨트에 대하여
나는 살을 도려내고 침대를 탈출했다. 자유를 얻는데에는 대가가 필요한 법이니까. 공사 현장에 나가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기획자의 책상에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새벽이 괴롭다면 그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기록해두기 위해서였다. 다소 가학적인 목적의 조기 기상이었지만 의미가 있었다. 새벽 5시 11분에 침대에 일어나 앉아서 젖히는 이불은 피부의 일부처럼 느껴진다는걸 알게됐다. 그러니까 다소 가학적으로 말하자면, 새벽의 이불을 젖힌다 함은 곧 내 피부를 도려내는 것과 별반 다를바 없다.
툴벨트는 공사 현장의 도구들을 담는 크고 작은 주머니들이 잔뜩 달린 두꺼운 벨트다. 툴벨트라는 단어를 봐도 가터벨트 같은게 떠오르는게 조기 기상의 부작용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정도 부작용일 뿐이라면 깨어있는 새벽에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1일차의 생각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몰라도 지금 현재 내 생각이 중요한 것 아닌가. 잠시나마 이런 생각을 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새벽의 가치를 내세우는 근거를 말하자면 가터벨트에 대해서 얘기해봐야 할 것 같다.
가터벨트가 가학적인 성인물에 등장하는 것으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곰곰히 그 네글자를 곱씹어 봤을때 그게 정확히 어떻게 생긴건지, 어떻게 착용하고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건지에 대해서는 전혀 떠오르는게 없다는 사실. 새벽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서 1차적으로 가터벨트를 비유적인 예시로 들었지만, 아직 직접적으로 새벽의 가치를 기술하진 않았다. 새벽의 가치라는 논지를 먼저 기술하는게 좋은 글쓰기 방법이라는 것은 알지만 꼭 좋은글을 써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논지를 직접 기술하기 전에 2차적으로 또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가터벨트의 이미지엔 익숙하지만 가터벨트의 실체는 모른다. 공사현장도 마찬가지다. 나는 건축을 전공한 탓에 이런저런 건물들과 학문으로서의 건축에 익숙했지만, 정작 건축물의 부분 부분들이 실제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오리무중이었다. 오리무중이었다는걸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 전에는 어렴풋이 알던것을 현장에 나가면서 불처럼 명확하게 알게됐다. 드디어 논지를 밝힐때가 왔다. 오늘의 새벽은 공사현장과 같았다.
오늘의 새벽은, 공사현장이 그랬듯이, 내가 안다고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서 사실은 제대로 알고있지 못했다는걸 일깨워 줬다. The Architect's Newspaper의 편집진에 올라있는 내 동문의 이름이 사실은 동명 이인이었다는게 첫번째. 신문에 연재되는 잘나가는 지난 인연의 글이, 잘나가 보이는 만큼 실제로 대단하진 않았다는게 두번째. 이렇게 협소한 가슴을 가지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새학기의 활기찬 학생들이 오가는 분수대를 앞에두고 되돌아보면 또 한번 실체는 미묘하게 달라진다. 이제야 읽어본 그 글들이 생각보다 별것 없는건 사실 '그 사람의 그 글이라서'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건 글이란 작품이기 이전에 하나의 아카이브이다. 글을 쓴다는건 대단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행위이기 이전에, 우리 안팍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결과물에 불과하다.
새벽 1일차의 새벽에 나는 기획자의 책상에 앉았다. 앉아서 위와 같은 생각들을 하고 웹서핑을 했다. 두 개의 책상이 내 방안에 있다. 시커먼 모니터 키보드 랩탑 마우스 등등 컴퓨터 장비가 잔뜩 올려진, 책상 자체도 시커먼, 그 앞의 육중한 인체공학적 의자마저도 거무틔틔한, 제작자의 책상이 보였다. 기획자의 책상은 밝은 나무색에 의자도 오래 앉기 어려운 이케아 플라스틱 양철의자다. 좋은 제작물이 있기전에 좋은 기획이 선행한다는 점에서 기획자석을 만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 역시 마찬가지다. 공사장에 나가며 집을 지으며 보고듣는 작업들을 쓰려고 말은 했지만, 사실 공사장 얘기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사실은 그냥 내가 쓰고싶은걸 다 가져다 쓰는 에세이. 마흔공사는 포장지일 뿐. 그런 나에게 공사 작업에 참여해주는게 고맙다며 전문 작업자들이 쓰는 툴 벨트를 선물해준 모이세스에게 내가 더 고맙다. 툴벨트를 받은 오늘에도 나는 툴벨트에 대한 문장(5)보다 가터벨트에 대한 문장(6)이 더 많은 글을 쓰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