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Culver City Stairs
일요일 아침 7시, 계단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27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컬버 시티 계단을 다섯번 오르내렸다. 두번 왕복하고 나면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한계단 한계단의 높이가 때로는 30센티를 넘어갈 만큼 높아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듯 호흡을 조절해야만 오를 수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높이가 들쑥날쑥한데다 간격까지 불규칙적이라 일정한 호흡으로 오르기가 어렵다. 호흡에 리듬이 생긴다 싶으면 갑자기 계단이 저 뒤로 물러나 힘을 쭉 빼놓기도 하고, 때론 갑자기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연인처럼 당황하게 만든다. 꼭 보리 쌀, 쌀 보리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컬버 시티 계단은 보통의 거주지에 설치되는 계단이 따라야할 규칙을 단 한가지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최저 최고 높이를 밑돌거나 웃돈다. 계단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넓을땐 너무 넓고 좁을땐 너무 좁다. 일정 거리를 오른 뒤에는 평평한 랜딩이 반드시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런 규칙따위 안중에 없이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사라지지 않는 계단이다. 끝난줄 알았지만 끝나지 않고, 익숙해질만하면 낯설게 다가오는, 도구라기보다 살아있는 생명체 같은 존재다. 일요일 이른 아침에 그런 불친절한 계단을 수도없이 많은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이색적인 계단에 이색적인 풍경들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느려도 느려도 너무 느린 아저씨들이지만 세번째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면 그것도 그리 느린게 아니었다는걸 깨닫게 된다. 계단을 오르면서 요상한 숨소리를 너무 크게내는 사람들 역시 결코 요상할것 없는 숨소리였다는걸 알게된다. 계단의 불규칙한 리듬을 맞추기 위해서 나름의 리듬을 찾아가려는 소리라는 사실, 나역시도 어느샌가 후- 흡후 습 흡흡후- 후웁 습 후- 따위의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오르고 있는 것.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내려오는 사람들이 왜 게걸음 걷듯 옆으로 몸을 틀어 한계단씩 밟아 내려오는지도, 계단에서의 시간이 가르쳐준다. 불친절한 계단을 힘풀린 다리로 안전히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발이 다른 계단에 닿는 지점에서 무릎을 보호하기에 더없이 좋은 선택이라는 사실.
마지막 정상에 이를때까지도 익숙해지지 않는 컬버 시티 계단은 많은 것들을 부숴놓는다. 계단을 다섯번 오르내리며 견고하게 닫힌 몸과 생각들까지도 무너뜨려 주는 계단이다. 마흔이라는 나이는 우연히 열개의 손가락 발가락을 타고난 인류 중에서도, 십진법을 쓰는 문화권의 인위적인 분기점이다. 그러나 진짜 마흔이 찾아오기 전에 가능한 많이 무너져봐야 한다. 곧 십진법으로 27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컬버 시티 계단을 가능한 많이 오르내려 봐야 한다. 전문가도 아니었을, 그리고 한 개인도 아니었을 어떤 사람들이, 자연의 언덕과 그저 적당히 타협해 디자인해둔 이 공간이 그래서 특별하다.
그 계단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그 계단이 아닌 다른 여느 계단들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보는게, 그 계단을 이야기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보통 계단은 주인공이 못된다. 계단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는 문장이 어색한 것은 그 이유에서다. 주인공도 아닌게 목적지가 되는건 영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계단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계단이라는 공간적 구조물이 타고난 숙명이 편리함의 제공에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평범한 경제적 조건으로 누리는 집 안에는 계단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첫번째가 좀더 까다로운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계단이 뻔히 있는데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이 누군가에겐 어불성설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엄청난 신기술을 자랑하는 도구가 아닌 이상, 사용자의 주목을 지나치게 끄는 도구는 좋은 도구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계단이 발명된지는 적어도 수천년이 지났을만큼 평범한 도구다. 우리 몸이 수직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도와주는 도구다. 아무런 생각없이 편히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최고의 계단이다. 이렇게 계속 반론에 발목잡혀 반론에 대한 반론만 쓰다가는 아무것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글한편이 다 끝나버릴 것이다. 구구절절 이유를 제시하는것은 여기까지 하기로 한다.
컬버 시티 계단은 구글맵 평점 4.8점을 자랑하는 어엿한 장소다. 어느 다른 목적지로 가기위한 도구가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어엿한 목적지인 계단이다. 아무리 이 계단에 대해서 쓰고 말해봤자 그 계단을 직접 한번 밟아보는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왠지 모르게 오늘의 문장들은 바로 본론을 향하지 못한채 빙빙 돌고있다. 계단이 어떻고, 특별한 계단은 어떻고, 보통의 계단은 어떻고, 여기 로스 앤젤레스 서쪽 동네에 있는 유명한 계단이 어떻고, 저떻고, 또 어떻고. 어떻게 보면, 혹은 저떻게 보면, 이 글은 마치 아주 길게 이어지는 계단과 같다. 밟아도 밟아도 평평한 목적지에 도달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