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정적 속 지하철 공간 분석

지하철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들

by 가소로

지하철이 멈췄다. 컬버 시티에서 로스 앤젤레스 시내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위잉하고 돌아가던 발전기같은 소리가 멈추고, 객차 안을 비추던 조명의 절반가량이 꺼졌다. 한여름 한낮이었는데도 꺼진 조명으로 어두워진 실내가 낯설 정도였다. 실상 소리가 사라지고, 조명이 꺼지기 전까지는 그런 소리가 있었는지, 조명이 켜져 있었는지도 몰랐다. 와글와글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있었고, 창밖 햇볕이 선글라스 없이는 건물 외벽도 편히 바라보기 어려울 정도였기 때문이다.


공간이란 얼마나 상대적인가. 공간 자체의 구조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건만, 소리 중의 일부 그리고 빛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 만으로 객차 내부가 그렇게 달라보이다니. 터널을 막 지났던가, 지상으로 올라오는 중간 쯤 반지하에 멈춰버린 풍경도 아마 한몫 했을 것이다. 거기 보태어 환기 시스템이 꺼진 것 역시, 그래서 조금씩 올라가는 실내 온도 역시도 크게 한몫 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평범한 지하철 공간을 수도없이 많은 소리들이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발전기 소리,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는 소리, 차량 바닥의 바퀴가 철로를 빠르게 굴러가며 마찰하고 부딪히는 소리, 왁자지껄한 승객들의 목소리에 때때로 들려오는 차장의 안내방송 소리까지. 가능한 조용한 공간을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너무 조용해진 차량 안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어색할만큼 조용한 곳에서 5분, 10분, 20분, 흐르지 않아야 할 만큼의 시간이 흐르는 것은 어색함을 짜증으로 바꿔놓았다.


어색함은 잠시였고, 짜증이 곧바로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하는게 맞겠다. 짜증. 아. 개-짜증. 계-주 달리기의 1번주자가 맡은 100미터의 10분의 1도 소화하기 전에 2번주자가 덮썩 바통을 가로챈듯 짜증이 덮쳐왔다. 차장은 안내 방송으로 미안하다며 트러블 슈팅 중이니 곧 다시 달리기 시작할거라 안내했지만 실현되지 않을 방송이었다. 객차에 전원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면서, 꺼졌던 안내 모니터에 낯선 시스템 부팅화면이 들어오며 희망을 부채질하다가, 속았지 이 자식들아, 하는듯 다시 모든게 꺼져버리기를 반복. 한번, 두번, 세번을 넘어 몇번인지 셀 마음의 여유조차 바닥났을때 마지막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베큐에이션 - 기차를 나가서 다음역으로 이동해 달라는 방송이었다.


햇볕이 뜨거웠지만 나가서 걸으니 그래도 짜증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하철 연착이야 허다하지만 중간에 멈춘 차량 탓에 선로에 나와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짜증이 가시니 길게 한두줄로 걸어서 지하철 옆을 걷는 행렬을 사진으로 담을 여유도 생겼다. 정면 한장, 후면 한장, 하고 폰을 집어넣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영어로, 이런일이 자주 일어나나요? 하는 얼굴에 즐거움이 한가득이었다. 아마도 완벽히 대비되는 것들의 한쌍 - 흑과 백, 행복과 고통, 즐거움과 괴로움 - 등등에 그녀의 얼굴과 나의 얼굴을 한쌍으로 묶어 추가해도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질문에 비추어 여행 중일 것 같았던 그녀는 정말로 여행 중이었고, 짧은 담소를 나누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멀어졌다.


진정 공간이란 얼마나 상대적인가. 조명에 따라, 소리에 따라, 온도에 따라, 창밖 풍경에 따라. 그녀와의 예상치 못한 대화를 통해 한가지 요소를 더 추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관점.' 나는 이곳에서 생존하는 이의 관점으로, 그녀는 이곳을 여행하는 관점으로, 똑같이 멈춘 객차를 체험했다. 나는 분노했고 그녀는 행복했다. 아, 그러니까 건축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이라도 얻은건지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여전히 공간의 소음과, 밝기와, 온도와, 풍경은 더없이 중요하다. 사람이 사람의 관점까지 디자인 하는게 가능하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그게 가능한가?

keyword
팔로워 27
이전 04화와이파이와 계피커피의 건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