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마음 있는 사람, 정기현 단편소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서울 외곽을 돈다"는 문장은 "내 방의 건축 도면은 내 방을 그린다"는 문장과도 같다.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작 중 하나인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의 첫 문장이다. 거기에 건축 운운하는 내 문장을 갖다 붙인것은 이 소설을 건축적으로 바라볼 여지가 있어서다. 애초에 결심은 소설 자체에 대한 얘기보다 소설을 구실삼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첫문장을 쓰고 마음이 바뀌어 건축은 제쳐두고, 소설의 첫 문장에 대해서 우선 더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다. 소설이건 건축이건 짓는다는 점에선 같은일 아닌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서울 외곽을 돈다.
이 문장은 논리적으로 봤을때 무의미하다. 동어반복이고, 순환논리이기 때문이다. 좀더 찬찬히 살펴보자. 이 문장은 크게 두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어떤 대상의 이름이고, 둘째는 그 대상의 실체 - 그게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다. 문제는 이 문장이 기술하는 대상의 실체가 그 대상의 이름 속에 이미 들어있다는 점이다. 이름과 실체, 혹은 기표와 기의의 중첩으로 인해서 무의미가 발생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유명한 작품중 담배 파이프 그림 위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구를 써놓은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정 반대로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부정함으로써 의미를 획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이다.' 라고 썼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렇게도 무의미한 말을 정기현 작가는 소설의 시작부터 던지고 있다. (여러분, 파이프는 파이프입니다.) 여러 고속도로들 중 서울 외곽을 순환하는 고속도로이기 때문에 그 고속도로는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라는 이름을 갖게됐을 것이다. 대상의 이름과, 이름 속에 뻔히 담긴 대상의 실체를 굳이, 재차 기술하는데 자그마치 소설의 첫 문장이 할애된 셈이다. 그러다보니 그 무의미에 의심을 품게 되는게 사실이다. 앞서 뜯어본 무의미의 일반적인 구조(이름과 실체의 중첩)를 바탕으로 이 특수한 무의미를 더 깊이 들여다보자. 이 문장의 무의미는 두가지 조건 위에 성립한다. 서울 외곽을 도는게 이 도로의 실체일 것. 그리고 이름 속에 서울 외곽을 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것.
따라서 두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이 문장은 의미를 회복하게 된다. 먼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의 실체가 서울 외곽 순환이 아닌 다른 측면에 있다면 그 무의미는 힘을 잃을 것이다. 혹은 이 고속도로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면 이 문장은 무의미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이 두가지 경우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그것이 지나는 거여동 주민들에게 거여고가도로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즉,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에겐 서울을 순환한다는 실체가 포함되지 않은 다른 이름이 있다. 둘째, 거여동 주민들은 이 도로를 보고 서울 외곽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엄청 크다거나, 무너지면 마을 통째로 끝장이겠다는 식의 감각적 인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실제로 도로 주변을 오가는 주민들에게 이 도로의 실체는 서울 외곽의 순환과는 무관하다.
여기까지가 첫 문단이다. 이 세 문장을 통해서 작가는, 얼핏 무의미해 보이는 첫 문장이 사실은 무의미하지 않아요, 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나아가 어떤 대상의 실체에 대한 물음이 이 소설의 핵심이라는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아주 압축적으로 쓰여진 논문 초록(abstract)처럼 읽히는 문단이다. 다만 논문처럼 건조하고 논리적인 문장이 아니라, 친근하고 감각적인 문장이다. 친근하지만 은연중에 두개의 논리가 충돌하는 역동적인 문장이다. 이렇게 초반부터 건축만큼 구조적인 소설 탓에 잊혀진 진짜 건축 이야기를 해보자.
"내 방의 건축 도면은 내방을 그린다." 역시 무의미해 보이는 문장이다. 몇단계 건너뛰고 핵심적 질문을 하자면, 과연 내방 건축 도면에 내방의 실체가 담겨있는가? 하는게 이 문장의 무의미 여부 판단에 중요한 기준일 것이다. 개념적으로 보면 대답은 물론 그렇다 이다. 내 방 건축도면은 내 방 공간의 실체를 담고 있다. 가로 몇 밀리미터, 세로 몇 밀리, 창문은 남측 벽에서 동쪽끝으로부터 몇 밀리, 문은 어느쪽 벽인지, 여닫이인지 미닫이인지, 여닫이라면 문이 열리는 방향은 내측 혹은 외측, 벽의 두께는 몇 밀리, 천장의 높이는 얼마나 높은지 등등.
이런 방에 대한 개념적 실체는 사실 만드는 이의 입장에서 바라본 방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방을 직접 사용하는 내 입장에서는 어떤가. 나는 건축일을 하는데도 내 방의 어떤 벽이 북측 벽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글의 논지에는 부합하지만 건축하는 인간으로서 수치스러운 사실이다. 그러나 글을 짓는 동안은 글을 짓는 논리가 건물을 짓는 논리보다 우선되어야 하므로 삭제하지 않는다.) 내 방의 가로 세로 너비도 모르고, 따라서 면적은 당연히 모른다. 천장 높이도 오리무중이다. 벽의 두께는 더더욱이 모르고, 문의 정확한 위치도 수치로서 인지하지는 못한다.
정작 내가 인지하는 내 방은 이런 모습이다. 방 정가운데에는 큰 책상 두개가 마주보고 있다. 덜떨어진 명언같은 문구 몇 개가 적힌 화이트보드가 붙어있는 벽이 이 책상 맞은편 벽이다. 책상 뒷편에는 우리나라 책들과 영문 서적이 뒤죽박죽 꽂쳐있는 책장이 있다. 왼편은 소음으로 가득한 거리를 접한 창문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거실로 나가는 문이 있다.
내 방을 사용하는 입장에서 파악하는 내방의 실체는 만드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실체와 꽤 다르다. 건축 도면이 담고있는 것은 예컨데 창조주의 입장에서 내려다본 추상적이고 관념적이 실체다. 거기에는 공기도, 색채도, 질감도, 빛도, 심지어 사람도 없다. 오직 검은 선들과 그 선들로 구분되는 흰 면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면에 따라 지어져 내가 기거하는 방에는 도면에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공기, 색채, 질감, 빛, 나, 그리고 아침에 뀐 방귀 소리와 그 냄새 따위까지 들어있다. 모더니즘 건축에 이르기까지는 전자 - 이성적으로 파악한 공간의 개념적 측면를 중시했지만, 그 이후의 현대건축은 후자 - 공간의 체험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경향이 상대적으로 크다.
이런 측면에서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그 첫문장에서 소설의 공간적 배경을 모던-건축적으로 소개한다고 볼 수 있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서울 외곽을 순환한다 - 그것은 아마도, 그 고속도로를 설계한 1900년대 후반의 국토교통부 공무원 누군가가 붙인 이름일 것이다. 그 공무원은 아마도 지도상의 대한민국 국토를 신처럼 내려다보며 작업했을 것이다. 몇 센치미터의 크기로, 납작한 종이 위에 선과 면으로 축약된 서울시 외곽을 따라 선을 그어가며 도로를 구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기현 작가가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체험적으로 파악되는 거여동 일대의 실체에 대한 것이다. 소설 속 거여동에는 고속도로 도면 상에는 없던 공기가 있고, 빛이 있고, 색채가 있고, 음악 소리가 있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다. 어떤 공간이건, 어떤 대상이건, 그 실체는 살아 숨쉬는 사람이 파악하는 것이다. 공간 속을 거닐면서 현상들을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사람이 파악하는 세계의 실체는 어떤 모양인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근대 건축적이라기보다 현대 건축적이다. 거기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정신이 담겨있다.
여기까지가 건축과 연관지어 바라본 소설의 서두다. 꽤 많은 말을 했지만 몇가지 아쉬움을 털어놓자면, 정작 소설의 제목인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나아가 이 작품은 시작도 좋지만 끝이 더 좋은 경우인데 결말을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끝으로 소설의 끝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소설의 시작을 달리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말인 즉슨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서울 외곽을 돈다."는 문장이 소설의 결말을 알고나면 달리 읽힐 수 있다는 뜻이다. 나아가 이 문장이 무의미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서울 외곽을 돈다면,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겐 슬픈 마음이 있는가? 언어와 그 언어 이면의 실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