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 친구에게 컴퓨터를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한 것은 한달 전 어느날 부터였다. 컴퓨터를 운전한다니 이 근본없이 어색한 표현은 어디서 나온걸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이야기부터 해야한다.
그 친구가 나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기 시작한 것은 6개월 전이었다. 다시 그로부터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목수 친구는 (이하 MS) 어릴적 멕시코로부터 도망쳐 로스앤젤레스에 자리잡았다. 이런 저런 일로 밥벌이를 하다가 건물에 페인트 칠하는 일을 시작했고, 결국 건물의 프레임을 세우는 목수로 자리잡았다. 제대로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을리 없다. 컴퓨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운전은 이곳에서 생계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일이었다. 걸음마를 떼듯이 운전대를 잡는다.
'컴퓨터도 따지자면 자동차 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나는 조수석에 앉은 그에게 말했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가 필수적인 만큼 디지털 세계에서는 컴퓨터가 필수적이다. 모두가 운전에 능숙해 보이지만 그들 모두 서투르게 배우던 시절이 있었다. 컴퓨터 운전역시 그렇게 시작하면 된다. 컴퓨터 운전이 능숙해지면 우리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좋다, 그렇게 하자는 얘기였다.
나는 졸업 후 MS에게 목수일을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콤튼 근처의 다세대 주택 공사 현장에 멕시코 인부들은 많았지만, '세상에 직선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건 딱 한사람이었다. 그 친구의 작업을 보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직선을 향해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은 꽤나 문학적인 목수질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보면 또 다른 의미에서 문학적인데, 직선의 존재 여부를 공사 현장에서 운운하는게 왠지 소설 속 이야기인 것처럼 어색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운전을 교습료 없이 가르쳐 주는 친구에게 나는 건축을 가르쳐주기로 했다. 어색하기론 나의 커리큘럼도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르 코르뷔지에가 독일에 지은 건물을 컴퓨터로 모델링 해볼 계획이다. 1923년에 지어진 집을 2025년에 모델링한다. 자그마치 102년 전에 지어진 집이다. 이 건물은 가로 24미터, 세로 10미터 크기의 플랜인데, 이것은 우리가 콤튼 부근에 함께 지었던 주택과 거의 비슷한 크기다. 그 주택이 로스앤젤레스의 부족한 주택공급을 위해 지어진 것처럼, 바이젠호프의 집 역시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지어졌다.
이쯤에서 진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는 없겠다. 내 커리큘럼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친구의 배경 때문이라는 사실 말이다. 고등교육은 물론이고 기본 교육 마저도 온전히 받지 못한데다, 컴퓨터를 제대로 사용할 줄도 모르는 친구에게 코르뷔지에의 건물을 컴퓨터로 모델링 시키는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게 사실이다. 이 시대에 마우스 사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낯설고 어색한 것은 낯설고 어색해서 본능적으로 피하게 된다. 세상의 설계상 모순이 있다면, 이런 어색함이 오히려 반복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점.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것들이 어쩌면 처음에는 어색했을 것이다. 커피가 가배로 불리던 조선 말기에 커피의 맛과 향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자꾸 마시다보니 익숙해진 것일테고, 어색함도 수그러든 것 아닐까.
글의 끝자락에 다다라 드는 의문은 이 어색함이란 것의 정체다. 커피라는 대상의 맛과 향은 변함이 없건만, 그저 반복함으로써 - 그저 반복하는게 어렵긴 하지만 - 사그러드는 어색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커피맛이 어색하다고 할 때, 어색함이 맛 그 자체와는 다른 차원의 어떤 것임은 분명하다. 어색함이 미각을 통해 느끼는 맛은 아니라며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있지만, 그래서 그게 '무엇인지'는 영 답하기가 어렵다.
어려운 질문이다. 토요일 밤에 어울리는 질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토요일 밤에 어색함의 정체를 묻는일 역시 어색함을 자아내는 일들 중 하나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 만큼이나 어색한 일, 목수가 공부하는 100년전 코르뷔지에의 건물 만큼이나 어색한 일, 오늘 처음 제대로 시도해본 후방 주차만큼이나 어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