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다른 골목 공간에 대한 슬픔에 찬 탐구

by 가소로

버스에 앉은 내내 밀고 나가던 그 막다름의 무게가 남긴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다.


세상사가 대체로 다 나의 고장난 블루투스 이어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 아침 공사 현장을 향하는 버스에서 이어폰을 꼈을때 Battery 90%라는 안내음성에 나는 무덤덤했다. 그런데 무슨일인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Battery Low라는 경고음이 들렸다. 5분에 90%가 소진될 수는 없다. 무엇이 맞는건가 싶어서 휴대폰을 확인했더니 90% 가까이 채워진 게이지가 보였다. 다시 안도감 같은게 들었는데, 그 마음은 다시 Battery Low라는 경고음이 들릴때까지 고작 5분쯤 지속됐다. 경험상 두번 경고가 이어지면 곧 전원이 꺼지는게 보통이었다. 그래 꺼질 것이다. 음악도 함께 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음악의 매 순간 순간이 음표 하나 하나가 막다른 골목에 몸을 부딪히며 벽을 밀고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막다른 골목을 밀면서 나아가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로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첫문장부터 굳건한 벽을 보여준 다음, 그 벽을 한걸음씩 뚜벅뚜벅 밀면서 나아간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의 문장들은, 하나의 순환논리로 시작해 또 다른 순환논리를 향해 나아간다. 순환논리란 무엇인가? 순환논리야말로 문장에 있어서의 막다른 골목이다.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해 설명해보면 이렇다.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는 서울 외곽을 돈다." 무릇 문장은 하나의 주어로부터 여정을 시작해서 유의미한 다른 지점을 향해 나아가는게 보통이다. 이를테면, 내 이어폰이 꺼질락 말락 했다는 문장처럼 말이다. 내 이어폰의 존재를 보여주면서 시작한 문장은 그 존재의 상태를 제시하는 종점으로 나아가 마무리된다. 그러나 소설의 첫 문장은 그 반대다. 출발점의 주어로부터 의미 상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마치 벽에 부딪힌듯 다시 주어속에 이미 담겨있던 의미로 후진해온 모양새다.


여기까지만 보면 소설은 흥미롭다기보다 의아하다. 의아함 뿐이었다면 소설은 소설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정말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즉물적 세계의 순환논리가 아니라 대자적 세계의 순환논리다. 도로 따위가 어떻다는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어떻다는 이야기 -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게 슬픈 마음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얼핏 논리적으로 바라보면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도로 따위가 아니라 사람이 주어가 되었음을 간과해선 안된다. 사람의 마음이 주어가 되면 해석의 기반이 완전히 달라진다.


사물은 뭔가를 느끼고 판단할 마음이 없을 뿐더러 마음을 숨길 수도 없지만,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마음이란게 있고 그 마음을 숨길수도 있다. 다시말해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에겐 서울 외곽을 순환하지 않을 선택지가 없다. 나아가 사실은 서울 외곽을 순환하면서 겉으론 순환하지 않는 척 할 가능성도 없다. 애초에 겉과 속의 구분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가 서울 외곽을 순환한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얘기가 된다. 곧 무의미한 얘기, 논리적으로 말하면 순환논리에 빠진 문장이다.


슬픈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슬픈 마음이 있다는 문장 역시 논리 구조적으로 보면 순환논리에 빠진 문장이다. 그러나 주어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슬픈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서술된 사람에게는 사실은 슬픈 마음이 없을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정말로 슬프다 해도 안슬픈척 마음을 숨길 수도 있다. 심지어 내 마음인데 슬픈지 아닌지 여부가 모호한 경우마저도 있다. 그래서 슬픈 마음 있는 사람에게 슬픈 마음이 있다는, 그 당연한 말에 의미가 생긴다. 아, 저 슬퍼 보이는 사람은 정.말.로. 슬픈거구나.


그러니까 이 소설이 처음엔 슬픈 마음이 없는데 슬픈척을 해야하는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러나 그 주인공이 나중에는 정말로 슬픈 마음을 갖게되는 이야기라면, 이 소설은 논리적으로 봤을때 막다른 골목을 향해 나아가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막다른 길이라는 표현으로 이 작품을 설명할만한 이유는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도 소설 속 주인공과 같은 경험을 선사해 주는데, 독자 역시 소설을 읽기 전에는 없던 슬픈 마음을 품게 해주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만나는 이 소설은 최초의 순간에는 그저 이름으로만 존재한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란 8음절의, 혹은 4어절의 언어적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나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기호에 불과한 것들이 슬금 슬금 기호의 세계를 벗어나 독자의 마음 속으로 실제적인 손길을 뻗쳐오기 시작한다. 고작 흰 종이 위에 인쇄된 검은 기호 따위가 실존하는 사람의 마음에 촉각적 자극을 선사한다. 그렇게 슬픔 없이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을 읽기 시작한 그 사람은 이야기의 끝에서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된다.


나의 플레이리스트는 슬픈 음악들로 가득하다. 배터리 90%와 배터리 LOW 사이를 5분 간격으로 헤매던내 이어폰은 건설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슬픈 음악들을 연주해 나갔다. 매 순간 순간이, 음표 하나 하나가, 이제 곧 멈춰야만 할 것처럼, 막다른 골목을 밀면서 한걸음씩 나아간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은 벽같은게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 - 그건 도착한 뒤에야 알게되는 진실이다. 그렇다면 도착 후의 진실이 여정속의 진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답이 무엇이든 지금은 지금의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다. 벽같은 것이 보인다면 그 벽을 밀고 나아가 보자. 새로운 진실에 도달할 때 까지.




막다른 골목을 향해 돌진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이 글도 역시 막다른 길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결말이 어떻게 지어질지, 길이 트여있는지 관측하지 않은채 일단 문장을 시작하고 봤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엄밀히 말한다면 '확률적으로' 막다른 길을 향해 달린다고 보는게 맞겠다. 길이 트인걸 보지 않았다는게 길이 막힌걸 봤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가능한 진실하기 - 그게 막다른 골목을 향해가는 여정의 유일한 원칙이고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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