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마지막 겨울에 눈이 그렇게나 많이 내렸던 것은 씨네큐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미나리였다. 2021년 3월이었다. 미국으로 건너와 본격적으로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한 뒤로는 단 한편도 극장에서 본 영화는 없었다. 지난주에 관람한 왕과 사는 남자 사이에는 5년의 터울이 있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쓰기 위해서는 먼저 광화문에 대해서 써야한다. 세종대로에서 경희궁쪽으로 올라가는 언덕 왼편에 있는 씨네 큐브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는게 좋겠다.
내가 씨네 큐브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2002년 한여름이었다. 나는 마땅히 묵을곳이 없는 일종의 도망자 신세였다. 세종 문화회관의 유리벽 모퉁이에 누웠다가 경비 요원에게 주의를 받고 쫓겨난 뒤에 찾은 곳이 씨네큐브 옆 벤치였다. 지붕을 잃었다. 광화문 중심가에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몸을 뉘이려면 지붕은 포기해야 한다는 규칙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층 빌딩은 대체로 지붕이 없고, 캐노피 혹은 처마가 있더라도 그 아랫공간을 야간에 숙박을 목적으로 점유하는 것은 불법이었던 모양이다.
7월이었나, 한여름에는 해가 일찍 뜬다. 구름이 잔뜩 끼어서 어둑어둑한 하늘인데도 저쪽부터 서서히 밝아오는 것이 확실히 아침이 오는 모양이었다. 당시에는 벤치에 노숙자 점유 방지용 중간 칸막이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며칠간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이 편안함으로 들어서기가 무색하게 구림낀 하늘은 밝아오고, 밝아오는 하늘은 마치 제 얼굴을 너무 편하게 올려다보는 내 눈길이 불쾌하다는 듯이 빛방울을 툭툭 뱉어대기 시작했다. 그 무거운 빛방울이 무슨 알람 시그널이라도 되는 것 마냥 거리에는 정장차림의 남자 여자들이 종종종종 등장하기 시작했다. 광화문 사람들.
씨네 큐브 근처로 갔던 것은 건물앞 커다란 상영작 포스터에 이끌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슨 영화였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마치 프랑스였을 것만 같은 느낌의 영화 포스터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따름이다. 그렇게 짧디 짧은 도망자의 삶은 지나가고 더 이상은 쫓기지 않는 신세로 서울에 자리잡은 뒤에도 씨네큐브는 여전히 대피소 같은 역할을 했다. 뭐 할일이 없다 싶으면 일단 씨네 큐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몇 번 상호가 바뀌었지만 그 옛날에도 그 빌딩 지하에는 멋있는 이름의 패밀리 레스토랑이 있었다. 쏘렌토 같은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가 계절이랑 연관된 이름의 브랜드로 바뀌었다가...
유학을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의 마지막 겨울에 눈이 그렇게나 많이 내렸던 것은 씨네큐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문장을 내손으로 쓰고 나서 봐도 어처구니가 없는 문장이다. 씨네 큐브가 사람도 아니고 나를 어떻게 부른다는 말인지 의아할 따름이지만,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눈이 펑펑 내리면 산책이 나를 부른다. 밤이든 낮이든 북촌을 어슬렁 어슬렁 벗어나 광화문으로 접어들면 그때부터는 씨네큐브가 나를 부른다. 그리고 마침내 말이 되도록 말을 맞추기 위해서는 2002년 한여름의 그 빛방울을 불러와야 할 것이다. 그 불쾌한 빛방울이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 2019년, 2020년, 그리고 비로소 2021년 초 겨울의 끝자락에 나를 불러낸 함박눈으로 자라났다고 주장하는 위해서 말이다.
여전히 말도 안되는 주장에 뒷받침 거리를 하나라도 보태보자면 질량 보존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그런류의 무슨무슨 보존의 법칙에 기대어 볼 수 밖에. 원래 있던게 결국은 어디 안가고 다 거기서 거기, 빙글빙글 돌고 돈다는 이야기를 보태어야 할 것이다. 빛방울도 H2O, 눈송이도 H2O, 결국은 그 수소들과 산소들이 거기서 거기, 한반도 상공 어디를 배회하다가, 또 땅 속으로 꺼져서 어둠 속을 적시다가, 다시 지글지글 태양의 후라이에 힘 입어 상공으로 붕 떠 올랐다가, 아이 추워 추워하며 몸이 무거워 다시금 온탕 속으로 가라앉는 온천의 손님처럼. 2021년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것들 속에 그 옛날 도망자의 얼굴을 후려쳤던 수소 중 하나라도, 혹은 산소 중 하나라도 들어있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것 아닌가.
빛방울 딱 한방울에만 수소가 얼추 2000해 개, 산소는 1000해 개 정도 (1해는 10의 20제곱) 들어있다니 굳이 확률 따위 따져보지 않아도 그날의 빛방울이 훗날의 눈송이가 되었다는 데에는 일말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이와 비슷한 정도의 정합성을 지닌 논리에 따라 생각해보자면, 그 겨울의 씨네큐브에서 한 사람이 흘린 눈물이 결국 지난 주 로스 앤젤레스의 한 영화관에서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면서 흘린 눈물들이 되었다고 말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겨우 한방울에 몇 천 해 개씩이나 있는 수소이고 산소인데, 그것들 중 한둘은 한반도가 지겨워 태평양을 건너 나와 함께 유학길을 동행했다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산소이든 수소이든 단 한 개도 나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오지 않았다고 하는게 오히려 더 억지라면 억지일 것이다.
끝으로,
그렇다면 1457년에 한양에서 뚝뚝 떨어졌을 눈물들에 함유된 산소나 수소 중 한두 친구 정도는 21세기까지 그 언저리에 머물다가 씨네큐브에서 떨어지던 눈물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고,
정말 끝으로,
그렇다면 유해진의 눈물에 훌쩍이던 그 영화관의 관객들 눈물 중 알갱이 한 두개 정도는 1457년 그날 흐르던 눈물 속 알갱이와 동일 알갱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고,
이대로 계속 쓰다가는 무슨 말까지 뱉을줄 몰라서 이제라도 그만 마침표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 역시도 놀랄 이유 따위는 전혀 없는 그런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