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회랑 / 대런 에쓰모글루 / SIGONSA
제목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원제를 그대로 살린 번역본 제목도 좋다.
인도와 중국의 분쟁지역을 상징하는 실리구리 회랑이나, 2차 대전의 서막이 되었던 폴란드 회랑처럼 회랑은 평범한 지역이나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힘과 욕망이 부딪치는 긴장과 갈등이 잠시 멈춘 독특한 균형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주된 논지는 제목에서 아주 잘 표현된다.
이 책은 두말할 나위 없이 유명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장자의 책이라고 엄청나가 광고될 뿐 아니라, 저자의 이전 저작의 성공에 따른 후광을 입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추천사를 쓰고 유명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많이 언급하고 한 마디씩 얹었다.
책의 주제는 간결하다. 왜 어떤 나라는 경제적으로 성공하고, 어떤 나라는 실패하는가? 인공위성에서 밤에 찍은 한반도 사진을 보면 왜 북쪽에는 불빛을 찾아볼 수 없는가이다. 제럴드 다이아몬드에게 뉴기니 원주민 얄리가 던진 질문의 좀 세련된 버전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 역시 명확하다. 책에서 리바이어던으로 표현된 정치권력(혹은 국가권력)과 시민사회 사이의 권력분배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권력 혹은 시민사회 한쪽이 너무 강한 경우에는 국가가 보유한 역량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국가는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어찌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이 역사적 지역적 사례를 통해 설명된다. 국가와 사회 힘을 각각 양 축으로 하는 2차원 그래프에 여러 국가와 사회를 그려보면, 저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족쇄 찬 리바이어던'이 나타나는 영역은 매우 좁다는 것이고 게다가 이런 균형을 장기적으로 유지하기는 매우 적극적이고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이 책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지만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론에 맞을 법한 사례만을 선별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 인도에 대한 접근은 몰역사적일 뿐 아니라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자가 신자유주의자를 위해 쓴 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미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일군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론근거가 되어, 현재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국가 혹은 집단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근거가 될 수는 있겠지만 어느 누구도 새롭게 설득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때 성공과 번영을 구가했지만 이제는 폐허가 된 어느 신전의 사진이 표지에 쓰였다. 한 번 회랑에 들어왔다고 해서 영원히 그 안에 머물 수 없으며, 하루하루 싸우지 않으면 균형을 유지할 수 없다고 하는 저자의 논지를 잘 대변한다. 그러나 한국어판 표지는 폐허 자체에 집중하는 다소 지엽적 혹은 미시적 느낌이라 아쉬운 감이 있다. 이에 반해 영어본 표지는 폐허를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한 장소를 넘어선 긴 시간과 공간에서 사람들이 회랑의 안과 밖을 오가면서 번성과 쇠락을 거듭하는 것을 조망하는 관점을 가지게 한다. 한편으로는 쓸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역동적인 역사적 관점을 가지게 한다는 점에서 영어본 표지가 좀 더 적절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