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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아이의 시선에서 본 세상

엄마의 포켓몬이 되어 전력으로 전투에 임하는 아이들

by 고시포비아 Feb 27. 2025

엄마 손을 잡고 첫 영재교육 시험을 보러 가던 날이 서른이 된 지금도 아직 생생하다.


당시 나는 4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생님이 제시한 그림카드를 사건 순서대로 배치하는 문제를 풀기도 하고, 언어를 배치하거나 빈칸에 들어가는 낱말을 유추하는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어마무시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지금의 7세고시에 비하면 쉬운 수준이다.


거의 25년 전인지라 지금보다는 조기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했고, 당시 분위기는 영어나 수학 영재를 따로 뽑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 중에서 어느 하나를 잘하면 영재교육원에 들어갈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들어간 영재교육원에는 다방면의 영재들이 총집합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도 전에 영어 책을 줄줄 읽는 영어 영재, 과학 백과사전을 외우는 과학 영재, 집안 벽 한면을 삼국지 전신 그림으로 가득 채우는 그림 영재, 그 중에서 나는 한글 글쓰기에 재능을 보인 편이었다.


이후로 초등학교 저학년 동안 엄마 손을 잡고 이 학원 저 학원 참 많이도 시험을 보러 다녔다.

마치 엄마의 포켓몬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엄마가 포켓볼을 던져서 "시험 잘보고와!" 라고 하면, 나는 "피X츄!"라며 기합을 외치고 시험을 치룬 뒤 다시 포켓볼로 돌아오는 느낌이랄까.

시험을 보고 나온 뒤 엄마가 수고했다며 평소보다 맛있는 음식을 사주시고

후련한 기분으로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참 좋았었다.


어떤 문제 나왔냐며 엄마가 물어보면, 이러저러한 문제가 나왔다고 대답하고

엄마는 시험문제가 기억날 정도면 시험을 잘 본거라며 좋아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험의 난이도도 함께 올라갔다.


나는 점점 시험시간에 못 푸는 문제가 많아지며 패닉이 오기 시작했고, 시험이 끝난 뒤에는 시합에 져서 돌아온 투견마냥 꼬리를 말고 엄마에게 돌아왔다. 시험이 끝나고 결과가 통보되기 전까지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으면, 곧 전화를 받고 어두워지는 엄마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영재학원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뒤떨어지기 시작하자 엄마는 점점 더 조급해지셨고, 레벨 테스트에 떨어져 원장반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학원에 입학하지 못하면 크게 실망하셨다.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영재학원 동기 엄마들은 졸업하고 나서도 서로 연락을 하고 지냈었는데 그 중에 한명씩 연락이 되지 않는 엄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도 포기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오늘도 한 엄마가 연락을 끊었다면서, 내가 잘 하지 못하면 본인도 똑같이 엄마들 모임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마치 사형선고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자랑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학업적 부진함으로 인해 엄마가 사회적 매장이 될 수도 있다니 어린 나에게는 엄청난 공포감과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우리 모녀가 운명공동체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면서 엄마와 나는 더더욱 학원에 메달렸다. 학원은 하루에 2~3개씩 뺑뺑이를 돌렸고, 공무원인 아빠의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학원비가 부담스러워지게 되면서, 엄마와 아빠의 부부싸움은 잦아졌다.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마다
나는 내 교육비 때문에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안좋아진다는 것을 직감했고
가정에 이렇게나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도
엄마의 기대치를 못 맞추는 상황이 무력하고 절망스러웠다.

학원에서 돌아오면 학습지와 숙제가 한가득 쌓여 있었고, 엄마가 부엌일을 하시는 동안 시야가 닿는 책상에서 나는 항상 공부를 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솔직히 당시 나는, 혼자서 공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아니 배워서 익힌다는 뜻의 '학습' 자체를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당시 내가 학습했던 것은 학원에서 졸음을 참고 앉아서 버티기, 딴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기, 집에 와서는 엄마한테 들키지 않고 답안지를 베끼기 정도였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가지 않았고, 호기심을 자극하지 않았기에 아무 재미도 없었다.

차라리 학교에 가있는 시간이 유일하게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었다.

학교에는 나를 감시하는 엄마도 없고, 수업 내용도 쉽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놀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4살에 영재교육을 시작해서 중1이 되기까지, 반항 한번 없이 엄마가 가르치는 대로 모든 학원일정을 소화하고 '꼬마 범생이'로서 살았다. 내 안경 두께는 전교에서 가장 두꺼웠으며, 학원에서 받은 주입식 교육이 나름의 효과는 있었는지 초등학생 때는 거의 항상 올백을 받았다.




그러나 잘본 시험지를 들고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초등학교 수준에서 잘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하시며 선행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렇게나 돈을 들여서 가르쳤으니, 네가 잘해서 잘본게 아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다.


중고등학교 가서 잘해야지
초등학생 때 잘해봐야 무슨 소용이냐.
너가 잘해서 된 것 같냐?
다 내가 일찍부터 학원을 보내서 네가 잘하는 거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엄마는 '본인이 인정받고 싶은 심리'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 같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조기교육이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역설'이 아닐까 싶다.


엄마들은 '아이'의 성취를 통해 본인의 인정욕구를 채우고 싶어하는데, 이것이 아이의 성취인지 본인의 성취인지가 불분명하다. 멀리 보는 엄마들은 이때 아이를 칭찬하여 성취욕을 채워주며 동기부여를 하는 반면, 인정욕구에 대한 갈증이 큰 엄마들은 당장 이를 자신의 성취로 생각하여 본인의 남다른 교육열, 치열한 정보력과 실행력을 인정받고자 한다.


또한 자녀교육이 대학까지 달려야 하는 장거리 마라톤이라고 한다면 조기교육은 레이스 초반에 앞장선다는 전략인데, 문제는 초반에 선두를 달린다고 해서 우승하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기교육을 하는 엄마들은 지금은 내 자녀가 상위층이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뒤쳐질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필연적으로 안고갈 수밖에 없다.


이에 아이를 계속하여 채찍질하고,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잘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심어준다.

상위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최상위층으로 가기 위한 전략을 고민한다.


하지만 장거리 마라톤이나 경마 경기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사람이나 말이나 장거리 트랙 '전체'를 전력투구할 수는 없다.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결승전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단거리 경주이거나, 혹은 초반에 나가떨어지는 잘못된 전략을 취한 경우일 것이다.



 

중학생이 된 나는 결국 경기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과고' 혹은 '외고'를 가기 위한 트랙에서 미끄러진 것이다.

너무 어렸을 때부터 학업 스트레스에 시달렸기에 더이상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재 트랙에서 미끄러지고 보통의 아이들의 학습 루트로 돌아온 나는 엄마의 기대를 저버린 것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약 10년간 '영재' 자녀를 위해 학원을 쫒아다니고 전재산을 투자했던 엄마의 배신감과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까.

대출을 받아 집을 샀는데, 한 순간에 집이 불타 사라진 기분이었을 것이다.

10년 할부로 명품을 질렀는데 '이건 가품이네요'라는 말을 듣게 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때 이후로 엄마와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졌다. 엄마는 분에 차서 매일같이 나를 욕하고 때렸고, 나는 그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는 하나의 결말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생의 매 챕터마다, 시기마다의 결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내가 겪은 조기교육의 결말은 이러했다.


나는 보통의 학생 수준으로 돌와왔을 뿐인데
엄마는 마치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린 투자자처럼
배신감과 패배감에 가득 차있었고
자신의 기대치에 따라와주지 않은 자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었다.


착한 딸이기를 포기한 나는 점점 차오르던 풍선이 펑하고 터진 것처럼 묘한 해방감과 자유로움을 느꼈었고, 엄마에게 매를 맞고 욕을 먹으면 차라리 죄책감이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나에 대한 세간의 평판은 나빠졌지만(세간이라고 해봐야 엄마 친구들과 친척들이다), 나는 차라리 그때 반항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중학생 때 엄마가 정한 코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중학생보다도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생 때 폭발했거나

지금도 인형으로 살고 있거나 혹은 미쳐버렸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냐고?

결국 너는 그 조기교육 덕분에 명문대에 가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생 나이의 아이들은 입시와 시험이라는 가혹한 경쟁을 버티기에 너무나도 연약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엄마를 따라와 주는 단 하나의 이유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이다.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서일 뿐이다.


그 나이 아이들에게 엄마란 존재는 너무나 절대적이라서 나가서 앵벌이를 시키든, 고시공부를 시키든, 엄마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라는대로 할 수 있는 시기이다.


문제는, 반항하지 않는다고 해서 상처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7세고시'를 필두로 한 과도한 조기교육은 유년기의 아이들에게

무력감과 패배감, 자책감과 부담감을 학습하게끔 한다.


가장 부모의 사랑을 갈구할 시기에 사랑을 대가로 한 학업 스트레스를 겪어야 한다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 스스로가 겪은 경험인지라 아이들의 기분을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다.




정답을 찾는 것은 어렵지만, 오답을 찾는 것은 의외로 쉽다.


내 아이가 불행하고 힘들어한다면, 그 상처가 지워지지 않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인생에 영속적인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그 길은 오답이다.


내 주변에는 조기교육의 부작용을 겪은 친구들이 꽤 있다.

고3때 폭발해 결국 대학을 포기한 친구도 있고, 너무나도 부모의 말을 잘 들은 나머지 대학 이후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친구도 있고, 정말로 정신병이 심해져서 연락이 끊긴 친구도 있다.


아이를 위한 것인가, 부모를 위한 것인가?
불안감이 해소되는가, 불안감이 가중되는가?
내 아이가 행복한가, 불행한가?
내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할 기회를 오히려 박탈하는 것은 아닌가?



혹시라도 내 아이가 힘든 길을 가고 있다면,

엄마의 시선이 아닌 아이들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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