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의 시작과 엄마의 끝이 겹쳐 있던 시간
결혼식 버진로드를 들어서기 전, 나는 아빠 손을 잡고 커다란 문 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문 너머로는 남편이 신나게 걸어나가는 음악과 하객들의 환호성 소리가 들렸다.
아빠의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 "아빠, 많이 떨려?"
- "떨리기는 무슨.."
무뚝뚝한 경상도 말투로 아빠가 대답했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아빠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떠트릴 것 같았다.
떨궈진 고개. 잘게 떨리는 어깨. 슬퍼보이는 눈.
딸 결혼시키는게 그렇게 슬프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빠는 고개를 저었고, 이내 문이 열리자 아빠와 나는 한발짝씩 걸음을 옮겼다.
반가운 친구들의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옆을 스치고, 행복한 얼굴의 새신랑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가 너무 빨리 걸어가서 드레스를 살짝 밟기도 했다.
친구들은 그렇게 빨리 지나가는 신부는 처음 봤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아빠가 내 손을 건네자, 남편이 소중하게 받아 쥐었다.
여성이 남성의 전유물처럼 느껴지는 '신부손 건네기' 방법이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아빠와 함께한 덕분에 긴장이 덜 된다는 장점은 있었다.
아빠는 "어, 그래 OO아, 잘살아" 라며 남편의 어깨를 툭툭 감싸안아 치시고는 혼주석으로 쿨하게 내려가셨다.
이내 신랑신부의 결혼선서가 이어졌다.
선서문 너머로 혼주석에 앉은 양가 부모님들의 표정이 보였다.
시부모님의 인자한 미소.
슬퍼하다가도 함박웃음을 짓는 아빠.
그리고 너무나 처연하고 비장한 표정의 ... 엄마.
결혼식을 하는 중에는 엄마의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운지 몰랐다.
혹시 결혼이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정신없이 결혼식을 마치고 남편과 나는 호텔에 도착해 한숨을 돌렸다.
결혼이 끝나고 바로 미국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따로 해외로 신혼여행을 가지 않고 국내 호텔투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부부가 되었음을 기념하며 건배를 하고 있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인사한 이모였다.
- "혹시 수요일에 이모집에 올 수 있니?"
무엇인가 큰 일이 터졌음을 직감했다.
결혼식 내내 마스크를 벗지 않던 엄마.
어두웠던 엄마의 표정.
아빠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던 그 모습.
퍼즐이 맞춰졌다.
- "엄마가.. 수술이라도 해?"
아니라고 대답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얼버무리는 긍정의 말뿐이었다. 일단 신혼여행을 즐기고, 수요일에 오라며 이모가 전화를 끊었다.
- "왜, 이모님이 뭐라셔?"
- "엄마가.. 아무래도 큰 수술을 하는 것 같아"
천국 같던 신혼여행의 첫날밤이, 한순간에 지옥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다음날 바로 이모 집으로 향했다. 이모와 엄마는 의절하여 한동안 왕래를 안했었는데, 그 사이 이사를 하셨는지 처음 가보는 낯선 곳이었다.
나와 남편은 마치 사형선고를 받는 법정에 선 것처럼, 부모님과 이모 삼촌이 보는 앞에서 식탁에 앉았다.
이모가 포문을 열었다.
- "OO아 잘들어... 너희 엄마가 난소암 4기야. 목요일날 수술해."
울고불며 밤새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건만, 감당하기 힘든 문장이었다. 애써 담담하게 '그렇냐, 어제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예상은 했었다.' 라고 말을 꺼냈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엄마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큰 병원에 잘 예약했으니까 너희는 걱정말고.. 똑똑한 애들이라 그런지 눈치가 빠르네"
이모가 다독이는 말씀을 덧붙였지만 그저 현실감이 없었다.
결혼식 다음날, 엄마가 난소암 말기로 수술을 한다는 통보를 받다.
이 맥락에서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딸에게 알리지 않고 수술 날짜를 잡은 것이 아마도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만이 들뿐이었다.
배가 너무 아파서 찾아간 응급실에서 엄마는 난소암 4기라는 진단을 받았고, '살고싶지 않은데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주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치료를 포기하려 했지만, 회사를 정리하는 와중에 이모와 삼촌이 이를 알게 되었고, 어떻게든 수술을 받게 하기 위해 엄마를 설득해 주셨다.
결국 수술을 받기로 마음을 바꿨지만, 딸의 결혼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결혼식 이후로 수술을 미루겠다는 결심만은 절대 굽히지 않으셨다고 한다. 또 나에게 엄마의 암진단 소식을 알리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하셨다.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내 외할머니는 엄마의 결혼식 전에 심장병 수술을 받다 돌아가셨다. 엄마의 결혼식 사진 속 곱게 화장한 신부의 표정은 너무나 슬펐다. 그 굴레를 딸에게는 죽어도 물려주고 싶지 않으셨던 것이다.
배에 복수가 가득 찬 상태에서도 엄마는 반나절에 걸친 혼주로서의 궂은 임무를 끝내 다해내셨다. 내 결혼식 사진 속, 신부 어머니의 표정은 비장하다 못해 후련해보이기까지 하다.
엄마는 독하게, 정말 지독하게도 딸을 사랑했다.
나중에 이모를 통해서 들었는데, 내가 처음 엄마의 암진단 소식을 들은날, 내가 곁에 오지 않고 남편 옆에 그대로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엄마가 엄청나게 서운하고 실망했었다고 한다. 그런 내가 미워서, 엄마는 암투병을 하는 첫 1년간 내 연락을 잘 받지도 않았다.
당시 나로서는 엄마가 한번도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이모를 통해서 전화하고, 이모 집으로 불러서, 이모에게 통보하도록 한 일련의 상황이 엄마에게 솔직하게 다가기가 어렵게 만드는 무언의 장벽처럼 느껴졌다. 왜 엄마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걸까. 하다못해 아빠가 얘기해주기라도 했다면.
2년 넘게 의절해 그간 인사도 받아주지 않던 이모가 갑자기 등장해 이 엄청난 사실들을 하루도 안되는 시간만에 쏟아내자, 나는 마치 엄마에게 거부당한 듯한, 이 모든 것에서 내 자리는 없는 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나도 참 고지식하고, 멍청하기도 하지. 엄마는 내심 딸이 먼저 다가와 손을 잡아주길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결혼식까지 버티느라 이미 엄마는 할만큼 했으니, 이제는 딸이 먼저 한발짝 와주길 바랬던 그 마음이 지금 와서는 조금씩 이해가 된다.
또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엄마와 아빠가 직접 얘기하기에는 너무나 큰 아픔이었기에, 그나마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모가 대신 총대를 맸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
무엇보다도 말기암 환자 본인이 가장 힘든 당사자였고, 그 다음으로는 수술을 받으라며 설득을 거듭했던 '나를 제외한 가족'들의 고충이 가장 컸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채 해맑게 결혼을 준비하던 새신랑 새신부의 마음 따위, 누가 신경이나 쓸 겨를이 있었으랴.
더군다나 당시의 나는, 짧은 시간동안 많은 산전수전을 겪어 단단해진 지금의 나와는 많이 달랐었다. 표현에 솔직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모두가 내 행동을 지켜보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도 못하는 '얼라'였다.
엄마의 시험은 가혹했고, 나는 낙제점이었다.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사건을 보는 관점이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어렸을 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엄마를 솔직하게 사랑하지 못했었다. (관련글: https://brunch.co.kr/magazine/breaking-free)
한편 엄마는 암 말기가 되어서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바쳐 키운 딸'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처럼 느껴져 너무나 서운하고 미웠을 것 같다.
우리 모녀는 마지막 인사를 할 때까지도 미움과 사랑을 반복했다. 하지만 상처에서 새 살이 돋아나듯,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나에 대한 엄마의 사랑과, 엄마에 대한 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 여정을 용기를 내 써볼까 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