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응애 하며 태어났다고요
오랫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결혼식날 엄마의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라는 글을 올리고 나서, 친척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SNS를 통해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건네들었다고 했다. 그 대화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튼 좋은 소리는 듣지 못했다.
내 글을 보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내 글을 볼 수 있다는 것과,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나 역시도 상처를 받게 될까봐 글을 쓰기가 꺼려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치유의 과정이며, 내 글을 읽으며 위안을 받았다는 몇몇 독자분들이 다음 편을 애타게 기다려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 임진왜란 때도 조선왕조실록이 지켜졌고, 나치 점령지에서도 안네의 일기가 쓰여졌는데... 요즘 시대에 나 하나 정도는 자유롭게 글을 써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긴 시간에 걸쳐 화남과 놀람을 가라앉힌 후에야 다시 글을 쓸 준비가 되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엄마가 한국에서 암투병을 하고 있을 무렵, 내가 미국에서 출산을 했을 시점에서 시작된다.
10월의 겨울, 새벽 2시
진통이 시작되었다.
남편과 나는 근처의 산부인과를 찾았다.
진통이 점점 심해져 오는데, 마취과 의사가 다른 제왕절개 수술에 참여하고 있어서 무통주사를 맞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손을 잡고 진통을 꾹 참고 버티고 있자니, 의료진이 처음에는 빗을 손에 쥐어주다가 나중에는 펜타닐 알약을 권하기도 했다.
- 펜타닐이요?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무리 의료용이라도 그렇지 임신 중인데 펜타닐 진통제라니. 태아에게 전달되지 않을 정도의 양이라고 했지만 선뜻 그 진통제를 먹을 수가 없었다.
결국 마취과 의사가 올 때까지 쌩으로 진통을 버텼다. 새벽 5시가 넘어서 도착한 마취과 의사는 본인을 '마법사'라고 소개했다. 등에 커다란 주사바늘이 꽂히고, 무통주사가 척추를 타고 들어오는 쎄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도 잠시, 하반신의 모든 고통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 당신, 정말 마법사가 맞군요!
간호사와 마취과 의사, 남편과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미국의 산부인과 병동은 아주 큰 1인실로 되어 있었다. 간호사 대여섯 명이 한두시간 마다 교대를 하며 내 상태를 계속해서 체크했다. 1대1로 케어를 받는 만큼, 병원비 폭탄이 떨어질 것을 예감했지만 일단은 거기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병실 안은 새벽의 침묵이 흘렀고, 자궁구가 완전히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간호사는 이따 분만을 하려면 미리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며 나와 남편에게 잠시 자고 있으라며 휴식을 권유했다.
무통주사의 부작용으로 혈압이 떨어져 밤새 저체온증이 심하게 오기도 했지만, 다행히 제때 안정제를 투여하여 분만 전까지 안심하고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길었던 밤이 지나고 다음날 오후 12시가 되어서야, 드디어 '진짜' 신호가 왔다.
운 좋게도 주치의가 당직 의사로 근무하던 타이밍이었다. 주치의는 한인 2세의 여의사로, 임신 기간 동안 계속 진찰을 해주며 그동안 내가 몰랐던 자궁 질환도 찾아내준 고마운 분이었다. 익숙한 의사를 분만실에서 다시 만난 덕분일까, 긴장이 한결 풀어졌다. 남편의 신호에 맞춰 호흡을 하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 오 마이갓, 이렇게 빨리 나오는 아기는 처음 봅니다. 푸쉬! 푸쉬!
치어리더를 방불케 하는 간호사들의 신호에 힘입어 아랫배에 리듬을 타기를 여러번,
분만을 시작한지 20여분만에 아기가 태어났다.
- 응애, 응애
분만실을 가득 채운 아기의 첫 울음소리,
다른 세계에서 이제 막 건너온 생경한 존재가 세상에 처음 건넨 인사였다.
그 인사를 듣고 처음 든 생각은 엉뚱하게도 '진짜 응애라고 우네'라는 감상평이었다.
아직 뱃심이 약해 '응' 소리와 '애' 소리를 한번에 붙여 말하지 못해 '응, 애' 라며 띄어쓰기를 하며 울었다.
간호사가 내 가슴팍 위에 아기를 올려 놓았다. 순간 아기 정수리에서 훅 하고 아기냄새가 풍겨오자, 갑자기 단전에서 엄마 호르몬이 끓어올라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세상에, 내가 네 엄마야.
간호사는 아기의 입에 바로 내 가슴을 물렸다. 아기의 입이 너무 작아서 엄마의 유두가 다 물리지도 못했지만, 간호사는 이리저리 가슴을 쥐어짜더니 결국 투명한 한 방울을 짜내서 아기에게 먹였다.
- 봐봐, 모든 엄마들은 우유가 있어.
아무리 봐도 그건 우유보다는 땀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아무튼 간호사는 태어나자마자 모유를 먹이는 것이 중요하다며 아기에게 젖을 물리게 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엄마의 가슴팍에 달라붙어 모유를 빠는 시늉을 했다. 눈도 뜨기 전부터 본능적으로 젖 먹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제 회복실로 이동할 차례였다.
이제 막 분만을 끝낸 나는 휠체어에 앉아 갓 태어난 신생아를 떨리는 손으로 건네 받았다. 미국의 분만센터는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건물이 커서 분만실에서 회복실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아기를 안고 휠체어에 앉아 그 긴 복도를 이동하는 동안, 마주치는 모든 간호사들과 환자들이 환호성과 축하 인사를 건네었다. 마치 에반게리온 엔딩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 Congratulations!
- She’s beautiful!
남편은 의기양양하게 땡큐를 외치며 휠체어를 밀었고, 나는 마치 출산 시뮬레이션 게임을 1인칭 시점으로 플레이하고 있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기분마저 들었다.
모자동실과 모유수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은, 신생아실을 따로 두지 않고 엄마 침상 옆에 아기 배시넷을 놓고 수시로 모유를 먹이게 했다. 문제는 모유가 아직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미국 의료진들은 큰일이라며 '모유 전문가'를 투입시켰다.
모유를 먹이는 자세, 엄마의 마음가짐 등 다양한 솔루션이 제시되었지만 동양인 산모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들이었는지 가슴이 너덜너덜해져 피멍이 들때까지도 모유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따로 챙겨온 액상 분유를 몰래 먹이다가 의료진에게 걸려서 5명의 모유 전문가에게 교정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한 아기와의 맨살 스킨십이 중요하다면서, 아빠와 엄마 각각 상의를 탈의시켜 아기를 가슴팍에 올려놓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말도 안되게 보드랍고 좋은 냄새가 나는 아기와 찰싹 붙어있으니 정말이지 세상을 다 가진 듯 했다.
분만센터에서의 폭풍 같던 하루가 끝나고, 퇴원일이 다가왔다. 아무리 자연분만이라도 그렇지 분만한지 하루만에 집에 가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더 오래 입원을 하면 보험 처리가 안될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듣고 우리는 바로 짐을 쌌다.
태어난지 하루만에 카시트에 타 집으로 오게 된 아기와, 그런 아기를 데리고 와 멍하니 쳐다보는 만 하루 경력의 엄마와 아빠였다.
시작부터 만만치 않은 미국 육아의 첫 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후 초보 엄마아빠의 서투른 손길 속에서도 아기는 감사히도 무럭무럭 자라주었다. 한숨도 못자는 나날 속에서도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아기를 보며 너무나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덧 아기가 100일이 되어 비행기를 탈 수 있게 될 때쯤, 암투병 중인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국에 올 수 있냐는 연락이었다. 아기를 가족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비행기표를 예약했다.
2년만에 가족들을 볼 생각에 나는 젖먹이 아기와 단둘이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하면서도 힘든 줄을 몰랐다.
한국에 도착해 엄마가 집에 안 계신다는 것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