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생존일지
새벽 3시, 잠에서 깨었다.
하얀 눈꽃으로 덮인 벌판에서 엄마와 걷는 꿈을 꾸고 있었다.
어두운 방천장이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한다.
새삼 옆자리에 누워 자고 있는 남편의 온기가 고맙게 느껴졌다.
방너머에 자고 있는 딸아이의 존재도.
이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새벽을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다시 그날로 돌아가본다.
엄마의 수술날.
수술은 9시간 넘게 이어졌다.
온 가족의 간절한 기도가 닿았을까.
긴 기다림 끝에 수술이 무사히 끝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자궁을 들어내고 소장을 3cm 절제했다고 했다.
수술이 끝난 엄마는 얼굴이 흙빛으로 수척했지만,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큰 고비를 한번 넘었다는 안도감에 온 가족의 긴장이 잠시 풀렸다.
엄마는 출발선에 바로 섰다.
이제부터 '살기 위한 투쟁'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총 6번의 항암치료가 예정되어 있었다.
-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희망적인 일이야. 암세포가 너무 많이 퍼졌으면 수술을 못하고 항암치료를 먼저 했어야 하는데 말이지...
- 그런데 폐로 전이된 것보다 장 쪽으로 전이된 경우가 예후가 더 안 좋대... 독한 항암약을 버티려면 체력이 되어야 하는데 장을 절제하면 소화기관이 약해져서 살이 빠지나봐. 더군다나 장폐색이 오면 큰일이다.
- 항암제가 잘 들어야 할텐데... 내성이 생겨서 항암제가 효과가 없어지면 종류를 바꿔야 하는데, 더이상 쓸 수 있는 약이 없게되면 거기서 치료는 끝인 거다.
가족들은 암 환우가 모인 카페에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그곳은 같은 처지의 '환자 선후배'와 '보호자 선후배'가 정보를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곳이었다.
엄마는 본격적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하면서 하루하루를 카페에 기록했다.
어떤 약을 투여했고, 오늘은 무엇을 먹었고, 몸 상태는 어떤지...
단순한 게시글이나 일기라기보단 일종의 '생존일지'에 가까웠다.
피검사 결과가 잘 나오는 날에는 엄마의 글에 신바람이 묻어나왔다.
백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처럼 엄마는 글을 공유하곤 했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이 달리면, 엄마는 하나하나 답글을 달아주었다.
반면 몸이 안좋거나 검사 결과가 좋지 않은 날에는 자신감이 옅어졌다.
- 이런 생각 하면 안되는데... 정말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힘이 빠지네요. 가족들이 다 나 때문에 고생하는데, 결과가 좋아야 하는데요...
언제나 씩씩한 엄마였지만, 카페에 올리는 글에서만큼은 그녀의 불안함과 두려움이 여과없이 묻어나왔다.
남편의 직장 문제로 인해 결혼 후 미국으로 나와 살고 있었던 나는, 엄마의 카페 글을 통해 소통했다.
엄마는 카페에 글을 올릴 때마다 나에게 첨삭을 봐달라고 했고, 나는 글이 많이 늘었다며 엄마를 응원했다.
- 어머, 진짜 내가 글을 잘 써?
- 딸한테 받는 칭찬이 제일 기분 좋아.
그렇다고 또 잘썼다고만 하면 엄마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 칭찬만 하면 어떡해, 어떤 점을 고쳐야 하는지도 알려줘야 내가 글이 늘지.
- 우리 딸은 잘했다고만 하지 않고, 부족한 점도 알려줘서 좋아.
공기 반 소리 반도 아니고, 칭찬 반 비판 반으로 입맛에 맞게 피드백을 해준 뒤에야, 엄마는 만족했다.
'미국에 사는 딸이 보낸 편지'라는 글에는 내가 엄마에게 쓴 편지가 올라가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딸과 글을 통해 소통하며 사이가 좋아졌다며, 카페 회원에게 자랑하는 엄마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난소암 말기의 5년 생존률은 10% 내외에 불과하다.
사실상 예정된 운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여정임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않기 위해 엄마는 글로써 기록하고 소통했다.
항암을 받는 동안, 그리고 핸드폰을 들 수 있는 기력이 남아있는 동안, 엄마는 1년이 넘게 꾸준히 글을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의 글에는 하루하루를 살아감이 얼마나 소중한지에 대한 깨달음과, 함께 고생하는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져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었다.
엄마가 친하게 지내던 카페 회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회원이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몇 달 만에 글이 올라왔다.
반가운 마음에 글을 눌러본 엄마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고 했다.
그 글은 그 회원이 아닌, 가족이 대신 올린 소식이었다.
- 남동생 되는 사람입니다.. 누나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투병하는 동안 많이 의지하고 소통했던 곳이었기에 다른 분들께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 제가 대신 마지막 글을 올립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엄마는 충격에 며칠 동안이나 댓글을 달지 못했다.
- 딸, 엄마도 이렇게 되는 것 아닐까? 너무 무서운데, 네 아빠나 이모한테는 말을 못하겠어.
엄마가 그렇게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당시 미국에서 만삭이었던 나는, 엄마와 한참을 전화하며 위로하고 안심시키며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공포가 점점 커져가는 것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엄마의 글에는 삶을 조금씩 내려놓으려는 마음과 마지막을 준비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