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흩어짐과 피어남 속에 결의

암말기 엄마와 어린 딸 사이, 무너지지 않으려 기록한 날들

by 고시포비아


백일이 채 안된 아기와 단둘이 12시간의 비행.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울음소리도 작고, 하루에 잠자는 시간도 길어서 아기는 비행 내내 품에서 잠을 잤다.


아기가 작아서 배시넷에 눕힐 수도 있었다. (12키로가 넘는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모유가 아직 나오던 시기라, 애기가 보채면 모유수유용 웃옷 안에서 젖을 물렸다.


항공사의 배려인지, 오랜만에 고국을 찾는 교포 할머니들이 주변자리에 앉으셔서 도움도 많이 받았다.


옆자리에 앉으신 할머니는 암에 걸린 언니를 보러 20년만에 한국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난소암이셔서 아기랑 같이 가는 길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기내식으로 나온 고기반찬을 건네주셨다.


괜찮다며 사양하자 할머니는 채식주의자라며 아기 엄마는 많이 먹어야 한다고 하셨다.


40년 전 간호사로 미국에 건너오시게 된 이야기, 오리건 주에 정착하시게 된 이야기, 등등


할머니와 이야기보따리를 풀다보니 어느새 한국에 도착해 있었다.



공항에는 아빠와 삼촌이 마중을 나와 계셨다.


아기가 사진보다 엄청 작다며 두분 다 놀라셨다.


아빠와 삼촌과 차를 타고 인천공항에서 출발해서 집으로 가는 길,


- 아빠, 엄마는 집에 있어?


아빠와 삼촌이 잠시 말을 골랐다.


- 엄마는 지금 병원에 있어.


- 왜?


한달 전부터 장폐색이 와서 음식을 먹지 못하고 콧줄과 영양제를 맞아야 해 입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아기를 데리고 부모님 댁이 아닌 이모네 집으로 향했다.


이모네 집은 엄마가 1년 간 투병하며 신세를 졌던 곳이다.


엄마가 먹던 약이 방 한켠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과 집을 오가며 사투했던 흔적이 집안 곳곳에, 가족들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암말기 환자가 있던 자리에 백일 된 아기가 들어오자, 집안에는 잠시 그늘이 가시고 웃음꽃이 피었다 사라지곤 했다.


엄마는 그런 그림을 만족해 하셨다.


엄마는 지독할 만큼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오죽하면 어릴 때부터 엄마가 얘기해준 이런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 엄마 친할머니는 진짜 독한 사람이야. 치매가 오니까 자식들한테 피해 끼치기 싫다고 농약을 먹고 한번에 가셨어. 대단하지.


친척들은 그런 친할머니의 기질을 우리 엄마가 가장 많이 닮았다고 했다.


또 엄마 친척 중에 암 진단을 받자마자 뒷산에서 목을 멘 삼촌이 있다는데, 그분의 이야기도 무용담처럼 전해지곤 했다.


다시 들어도 충격적인 얘기인데, 확실한 건 보통 분들은 아닌 것이다.


엄마는 정작 본인은 병원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채 콧줄을 끼고 있으면서도,


매일같이 가족들에게 이것을 먹어라, 저것을 먹어라 하며 음식 링크를 카톡방에 올리셨다.


먼 타국에서 출산을 하고 온 딸이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갔으면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엄마가 보낸 음식을 한껏 먹고 카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엄마는 병상에서 똑같은 사진을 몇번이고 다시 보면서 답장을 보내시곤 했다.




엄마를 보러 한국까지 왔건만, 정작 병원에 면회를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코로나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시기여서 방문 횟수와 인원 제한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백일이 갓 된 아기를 100% 케어할 수 있는 사람은 엄마인 나밖에 없다 보니, 면회를 하러 가는 날은 아기랑 같이 외출을 하거나 아기를 봐줄 사람을 구해야 했다.


병원에 손님이 없는 주말이 되어서야, 엄마는 로비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가족과 면회를 할 수 있었다.


1년 만에 본 엄마는 말 그대로 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장폐색이 와 먹지를 못하니, 40키로가 채 안되어 어깨뼈와 얼굴뼈가 다 드러나 있었다.


그 와중에도 엄마의 눈빛만은 샛별처럼 빛났다.


휠체어를 탄 엄마의 메마른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지던 와중,


- 넌 머리가 그게 뭐냐.


딸을 향한 그 첫마디에 웃음이 터졌다.


엄마는 여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유모차에 탄 손녀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기는 뚱한 표정으로 할머니를 응시했다.


- 지 아빠랑 똑같이 생겼네.


퉁명스러운 말과는 달리 엄마는 한참을 손녀를 바라보았다.


- 네가 큰일했다.


여태껏 엄마에게서 들어본 칭찬 중에 가장 큰 칭찬이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아직 그 말이 귀에 멤도는 것 같다.




면회가 끝나고 엄마는 잠이 온다며 휠체어를 타고 병상으로 다시 올라갔다.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나는 아기와 함께 또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혹시라도 엄마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하지만 희망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다.


희망이 가장 큰 소리로 꺾인 날은 엄마의 마지막 대학병원 진료 날이었다.


항암약이 대부분 통하지 않고, 몸무게가 너무 많이 빠져서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는 체력이 아니게 되자,

의사는 항암치료를 중단할 것인지 결정하라고 했다.


아빠와 가족들은 신약으로라도 항암치료를 받기를 원했지만,

엄마는 강경히 거부했다.


그나마 남은 시간조차 항암 부작용으로 괴롭게 날려버릴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엄마와 의사는 그동안 고생많았다며 서로 악수를 하며 진료를 마쳤다고 한다.




이후 엄마가 병상에서 카톡을 보내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핸드폰이 점점 더 무거워진다고 했다.


전화를 받지 못하는 날들도 더 많아졌다.


모르핀 투여량이 늘어나면서 잠들어있는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목소리는 더 쉬어갔다.


장폐색으로 물을 먹지를 못하니 말을 오래 하지를 못했다.


병원에 방문해서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링거걸이를 짚고 일어나 하루에 몇분이라도 걸었다가, 점점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날 수 없게 되고,

그 다음에는 앉아있을 힘이 없어서 누워만 있게 되고, 이후에는 누워서도 몸을 스스로 뒤집을 수 없게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그 와중에 아기는 어느덧 자라 스스로 뒤집을 수 있게 되었다. 팔에 점점 힘이 생겨 엎드려 고개를 들 수 있게 되었고, 목을 가누기 시작했다. 앞으로 기어갈 수 있는 거리가 매일같이 길어졌다.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어른을 보면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엄마는 속절없이 죽음을 향해 가까워져 가고 있었고, 아기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 명백한 삶과 죽음의 대비는, 낙엽이 떨어지고 새잎이 돋아나는 나무 앞에서, 바람에 흩어지고 새로 생겨나는 구름 아래서, 그저 바라보며 서 있게 만드는 종류의 것이었다.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누군가가 알려주는 것 같았다.





엄마가 몸이 더 나빠지기 전에 사망보험을 내 앞으로 변경해주겠다며 외출을 했던 날이 생각난다.


그 날은 눈이 소복히 내린 날이었다. 엄마가 콧줄을 낀채 휠체어에 타고 보험회사 사무실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다들 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법정상속인에서 딸로 수익자를 변경하는 서류를 작성한 뒤, 엄마는 한결 후련해진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 집은 아빠한테 줘라.


나는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대답했다.


나중의 일이지만, 이후에 발견한 엄마의 수첩 속에는 어떤 사망보험금과 재산이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지에 대해 몇번이나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발견되었다.


혹시라도 엄마 죽음 이후에 이로 인한 가족들의 분쟁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친척과 지인들의 자녀 축의금과 부조금을 직접 챙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 돈을 지인들에게 미리 부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엄마가 예전부터 가장 좋아하던 동화책이 바로 <할머니가 남긴 선물> 이라는 책이었다.


돼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손녀와 일상을 함께하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 눈 쌓인 길목에서 엄마는 창문 밖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엄마와 나 모두 이것이 마지막 외출임을, 마지막 풍경임을 내심 직감했다.




그 즈음, 나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다.


임신 중 검사에서 알게된 자궁 질병이 있었는데, 최대한 빨리 수술을 했어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출산 이후 최소한의 회복의 시간을 가진 뒤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수술을 마치고 한달 뒤, 엄마는 이제 일반 병상에서 버틸만큼 버텼다며 호스피스를 알아보라고 했다.


호스피스로 가면 연명치료의 중지와 모르핀 과다 투여로 평균 2주 정도만에 임종을 맞게 되니, 그동안은 내 수술 일정을 고려해 호스피스를 가지 않고 일반 입원실에서 암성 진통을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을 받고 몸을 어느정도 회복했으니, 이제 딸이 본인의 장례를 치룰 체력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또한 엄마 스스로도 그간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던 듯 하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딸의 몸상태를 생각하다니, 그 단단한 결의를 나는 어떤 표현으로 담아내야 할지 모르겠다.




엄마는 결국 2달여 간의 입원생활 끝에 호스피스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호스피스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의 진실된 마음을 비로소 마주보고, 마주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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