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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Aug 18. 2022

신의 직장을 제 발로 걸어 나왔다

#1. 무식해서 용감했던 퇴사 결심, 지옥의 동굴로 들어가기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써서 먹고살아야겠단 생각은 어려서부터 줄곧 해왔다. 그림 그리기를 제법 잘했고 좋아해서 미대에 진학하고 싶단 생각도 꿈 많은 고등학생으로서 잠시 해본 적이 있지만, 전형적인 서민 가정의 착한 딸이던 나는 엄청난 사교육비가 든다는 정보를 접한 뒤로는 부모님께 말씀도 한 번 드려보지 않고 곧바로 포기했다. 


글을 쓰는 직업 중에 매월 일정한 급여를 받음으로써 밥벌이가 되는 직종을 고르고 골라 과거에는 기자를, 지금은 변호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 평생 기억에 남을 애증의 로스쿨이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적지 않은 나이에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와 로스쿨에 들어갔나. 흔한 케이스일 것 같지만 막상 로스쿨에 들어갔을 때 유사한 케이스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단편적으로 정리하자면 <비법(그것도 사학과)/여자/30대 중반>이 고시공부 경험도 없이 덥석 입학한 것이다. 로스쿨 합격을 통보받고 나서도 1월 말까지는 일을 했고, 퇴사와 동시에 2개국(한국, 호주)에서 결혼하고 신혼여행까지 다녀오느라 선행학습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장 첫 학기 중간고사부터 불구덩이 같은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상 외로 눈물겨웠던 수험기를 정리하기 전 그 계기부터 간략히라도 적는 게 순서일 듯하다. 




두어 차례 이직을 거쳐 나이 서른이 될 무렵 안착한(할 것이라고 믿었던) 기관은 거의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년까지 다니는 직장이었다. 드물게도 연봉제가 아닌 호봉제를 유지하면서 재직년수에 비례해 따박따박 월급이 오르는 구조인 데다, 일반 사기업이 아니기에 '망할 염려' 따위는 영영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 기관의 신문국 소속으로 기자라는 직함을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기사를 쓰는 일은 축복과도 같았다. 흔히들 재정이 탄탄해서 일정 수준 이상의 급여가 보장되고, 삶의 질도 높은 일터를 '신의 직장'이라고 한다면, 그곳이 꼭 그와 같았다. 소싯적 단지 영화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최저임금 이하의 열정 페이를 받으며 이따금씩 배우나 감독을 만나고, 시사회나 영화제를 다니면서 '그래도 나는 영화기자'라고 자위하던 시절을 지나 더욱 그렇게 느꼈는지 모른다.


만족스럽던 직장에 대한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시기는 입사한 지 3년이 가까워질 무렵. 


기관 특성상 몇 년 주기로 임원이 교체되는데, 새로운 임원과 더불어 내가 속한 조직 내부에서도 인사개편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리더로 부상한 분들은 밑에 기자들을 쥐어짜서 자신들의 안위를 지키기에 급급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즐겁게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기자라는 직업의 독립적인 특성 때문이다. 까짓 거 상사와 성향이 좀 맞지 않는다 한들, 취재처로 휙 나가 나만의 아이템을 발굴해서 멋지게 기사로 완성해버리면 그만이다. 굳이 택하자면 상사와 좋은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기자보다 취재원과 돈독한 기자가 내부 정치에서 뒤처질지언정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는 낫다는 얘기다.


적어도 그렇게 지켜온 기자로서의 자부심은 어느 날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기사를 삭제하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상대방 측 변호사의 연락에 '데스크'라 부르던 이들이 담당기자에게 통보조차 하지 않고 당일 통째로 기사를 내려준 사건이 첫 번째, 모 국립대 교수의 비위행위를 제보받아 두 달여에 걸쳐 공들여 작성한 기획기사가 언론중재위원회까지 가서 법에 대한 무지로 인해 굴욕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 두 번째. 


중재 당일 내가 속한 신문국과 해당 교수는 모두 변호사를 대동했지만, 실제 재판처럼 온갖 법률용어로 으름장을 놓던 상대방 변호사와는 달리, 일종의 '사내변'인 우리 기관 소속 변호사는 그 자리에서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다시 추가적인 소송을 제기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상대방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라는 황당한 중재안에 국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나와 다음 일정으로 잡혀 있던 인터뷰 장소로 향하던 그 순간의 기분은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다. 내 안에 무언가가 조용히 무너지는 느낌- 잘은 몰라도 법이라는 것이 상식에 반하는 위협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고, 속상했겠다며 다독여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마음속 응어리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대로 참고 직장을 다녔으면 다달이 쌓이는 통장잔고를 바라보며 재테크 정도에 관심을 기울였을까. 부당하다고 느낀 일이 있어도, 때로는 안일하리만치 담당업무가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서 흥미를 잃고 있다고 느끼더라도 한 곳에 장기근속하면서 얻는 장점이 분명히 있는데 나는 그것보다는 모험을 택했다. 


그날로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로스쿨 입학'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봤던 것 같다. 가장 보통의 변호사가 되어서, 주변인들이 법 몰라 고통받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그러고 나서도 퇴사를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1년 반 정도가 더 걸렸다. 직장을 다니면서 로스쿨 입학 준비를 한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퇴사할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순수하게 소요된 기간이다. 그만큼 가지고 있던 걸 내려놓는 일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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