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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Oct 12. 2020

나는 왜 육아 에세이가 불편했을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말이 곧 자기 최면이 되었던 시절

애를 키우고 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둘 다 아들이다. 두 아들들은 자면서 최대치의 에너지를 충전시킨다. 그리고 눈 뜨자마자 집안은 전쟁터가 된다. 장난감 수납장은 뒤집어있고, 공룡들은 거실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선 으르렁댈 준비 중이다. 한쪽에서 기차가 지나간다. 그 기차는 토마스와 친구들일 때도 있고, 고속 기차일 때도 있고, 나무블록 기차일 때도 있다. 각자 다른 노선에서 놀면 그나마 다행이다. 첫째의 공룡이 둘째의 기차를 공격하면, 거실 대첩이 시작된다. 4살 차이지만 팽팽한 접전이 이어진다.


둘의 싸움을 관망할 수 없는 엄마는 결국 개입하게 된다. 엄마의 등장에 둘 다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사실 두 아이들이 아침부터 괴성을 지르며 온 집안을 헤집고 다닌 덕에 이미 내 영혼은 탈탈 털린 상태. 아이를 달래고, 집안을 정리하면서 생각한다. 육아가 즐거운 엄마가 몇이나 될까? 나의 아이들만 유별나서 힘든 건가? 왜 나는 육아가 힘들고 버거운가? 나만 그런 건가?


그러다 한때 육아책에 의지한 적이 있었다. 블로그나 브런치에 육아 에세이도 찾아 읽었다. 그럴 때마다 난 불편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저들은 나처럼 독박 육아는 아닐 거야'

'친정엄마가 끄는 유모차 옆에서 여유롭게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거야'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피해의식이 난무했던 시절, 철없던 생각에 빠져 나를 우울하게 했던 생각들이다. 당시 내게 육아는 나란 자아와의 끊임없는 전투였다. 나의 시간을 갈아 아이들에게 쓰고 있었다. 그래서 버겁고 무겁기만 한데, 어떻게 하면 어떤 사물, 어떤 음식 하나만 봐도 아이를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감사할 수 있는 걸까. 그러면서 긍정의 사유를 지닌 엄마들을 불편해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라는 흔한 말이지만, 진심인 말이다. 나도 안다. 나도 두 아이가 내게 와준 게 고맙다. 그런데 가끔 나는 지친다. 모성애의 부족인 건지 체력이 달려서인지 점점 육아 산맥에서 나는 내려오지 못한 채 헤맨다. 그렇게 매번 어떻게 감사하고 즐겁게 마무리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이런 글들이다. 기승전 육아, 기승전 아이사랑으로 끝나는 글들. 요리를 하면, 입이 짧은 아이가 그나마 잘 먹어줘서 고맙다는 어떤 엄마, 아이를 보면서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던 어떤 엄마, 아이가 커가는 모습 자체가 감사하다는 어떤 엄마. 나는 그런 엄마들을 보면서 나와 비교하면서 나의 부족한 성정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서 오히려 그런 말들이 내게 상처가 됐다.


기-승-육아-결이라든가 기-육아-전-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배치하면 안 될까? 물론 나의 주관이다. 누군가 그런 글을 쓴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육아 글은 전적으로 사적 영역이니까. 나의 좀 큰 바람은, 육아가 육아로 끝나지 않길 하는 바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 생각했다. 어쩌면 이런 말들이 나 자신에게 거는 최면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엄마가 되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특히 집에서 아이만 돌볼 경우, 마음은 복잡한데 몸은 단순해진다. 온통 아이들을 돌보다가 하루를 마치고 나면, 기가 쏙 빨려 지쳐 쓰러진다. 엄마는 단순하게 일상을 쳇바퀴처럼 돌려 하루라는 시간을 가동한다. 그러다 보니 복잡한 게 싫다. 일일 드라마나 생각 없이 웃을 수 있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머릿속을  비우고 싶다.


관망의 자세로 소파에 널브러져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을 만큼 몸은 지쳐있다. 그렇다고 일찍 자면 뭔가 억울하다. 밤에 유튜브를 몰아서 보며 캔맥주를 홀짝홀짝 마신다. 결국 너무 늦게 자는 바람에, 다음날은 늦잠을 자버린다. 겨우겨우 아이들을 등원시킨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녹초가 된다. 밥맛이 없어 작은 컵라면에 끓는 물을 붓는다. 뭐라고 배우고 싶은데 시간도 시간이지만, 저거 배운다고 취직이 되겠나 싶다는 생각을 한다. 만약에 직장에 다니면, 저 두 아이들을 누가 돌봐줄 것인가. 일은 해도 일이 손에 잡히겠는가. 이런 생각에 골몰하다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을 어린이집으로 가서 데리고 와야 한다. 생각만 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이런 반복적인 사유와 행동은 자신을 단순하게 한다. 그리고 반성하는 마음에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그리고 블로그에 SF 에세이, 환상 소설 같은 글을 올린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우리 아이들이 내게 와줘서 고맙다고. 댓글이 달린다육아 글을 올릴  가장 많은 공감을 얻는다. 이렇게 다시 힘을 얻는 까? 


진심이 아니었던 글을 블로그에 올렸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그런데 문득 이런 행위들이  자신의 육아,  현실, 일상에 거는 최면이 아닐까. 도를 닦듯 육아를 해야 하는데 도를 어떻게 닦아야 할지 몰라 내게 최면을 건다. 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일단 거짓은 아니니),  사랑한다고, 말에 최면을 거는 것이다.


사실 육아가 힘든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엄마들에게 텅키로 넘겨진 집안일이 덤도 아니고, 원 플러스 원 행사도 아닌 것이, 집안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사실 빨래는 세탁기가 해주고, 청소는 청소기가 해주고,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해주는데 뭐가 힘드냐고 토를 달 수도 있다. 하지만 집안일은 결국 아직은 인간의 영역. 엄마가 아프면 집안은 올 스톱이다. 반찬을 만들고, 밥을 먹이는, 식사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매번 배달음식과 식당 음식으로 대처할 수 없으니 엄마의 노동력이 절실한 분야이다.


요즘 나는 일과 육아, 그리고 집안일에 허덕대고 있다. 긍정의 최면이 절실한 요즘이다. 하루하루 소중한 시간을 아낌없이 활용해야 한다는 나의 의지가 가끔 육아의 문턱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자기 최면을 걸어도 쉽게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태어나줘서 고마운'   존재들에게 사랑을 줘야 한다. 내가 얼마만큼의 사랑을 주었느냐는 아이들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몸이 지쳐도 마음을 다해 사랑을 줘야 한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은 사랑으로 보답해준다. 반대로 내가 화를 내면, 아이들도 화로 대꾸한다.



결국 엄마라는 지금 나의 시절에 써진 굴레는 세상의 또 다른 이면이고, 내가 몰랐던 세계이다. 알았더라면 굳이 진입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처럼 내게 육아는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가 아닐까. 결국 항상 직접 체험을 통해 세상을 배워왔던 나는 육아에 진입한 것이다. 그러니 어떤 식의 선택도 내게 후회라는 감정을 남길 것이 뻔하므로, 겪어보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다.



 치고받는 감정 게임에서

결국 먼저 인간적인 선택을 해야 하는 건,

세월은 좀 더 산 '엄마의 몫'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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