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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Aug 01. 2020

내가 나다워지기 위해 시간과 공간 확보가 시급했다

분노형 엄마, 새벽형 인간이 된 사연

나는 한때 시간 거지였다. 나의 동거인인 7살, 3살 된 두 아이는 엄마의 시간을 잡아먹는 좀도둑들이었다. 종일 요놈들을 씻고 먹이고 놀아주고 재우느라 정신없이 보냈다. 물론 지금도 사정이 많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그러다 보니 나의 하루라는 시간은 온종일 육아와 가사노동으로 공중분해되어 사라진다.


매일매일 나의 시간은 마치 고기 덩어리를 숭덩숭덩 써는 방식으로 잘려나갔다. 식사 시간으로 한 덩어리, 목욕 시간으로 한 덩어리, 요리와 청소하느라 한 덩어리 반이나 잘려나간다. 덩달아 덩어리채 잘려나간 나라는 존재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하루를 반성하는 약간의 시간으로만 존재했다.


특히 큰아이는 28개월까지 모유 수유를 했고, 37개월에 기저귀를 땠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자주 우울의 늪에 빠졌다.  내 안엔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만 가고 있었다. 결국 이런 마음들이 일정 수위를 넘어서면, 불쑥불쑥 아이들에게 토해낸다. 결국 밤이 되면, 후회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게다가 남편의 불규칙한 수입으로 나는 아이를 돌보지만, 일을 완전히 손에서 놓을 수도 없었다. 일과 육아를 하면서 지쳐갔지만, 경제적인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당시 친한 친구와 나는 서로 가난 배틀이라도 하듯 각자의 가난이 얼마나 극에 다다랐는지 넋두리를 일삼았다. 불행하다 생각하니 진짜 불행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약속이 있다며 나가는 남편을 나는 배웅도 하지 않았다. 자는 척 누워있었다. 내게 깨어있다는 걸 알았던 남편은 문자로 서운함을 남겼다.


“일할 때는 토스트도 챙겨주더니 일 안 한다고 아무것도 안 챙겨주는 거니?”


딱히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단지 만사가 귀찮았다. 결혼과 육아, 집안일과 경제적인 사정 역시 다 나의 짐으로 다가왔다. 온 세상에서 내가 가장 불행한 사람 같았다. 그렇다고 일상을 놔버릴 순 없었다.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니까. 엄마는 버티는 힘으로 일상을 견뎠다. 나의 엄마가 그랬듯 나도 별 수 없이 아이 엄마가 되었다.


요동치는 마음을 부여잡고 다시 나를 조용히 들춰보기 시작했다. 현미경처럼 나의 시간을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고기 덩어리와 덩어리 사이에 잘게 잘게 썰려나간 작은 고기 조각들이 눈에 띄었다. 분주한 하루 중 잘게 떨어져 나간 고기 조각처럼 작디작은 나만의 시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첫째가 유치원 간 사이, 둘째가 낮잠 잘 때, 화장실에 있는 잠깐의 시간, 아이들이 잠시 티브이를 볼 때, 두 아이가 엉키고 설키고 놀 때 등의 시간들이다.


한 점의 고기 조각은 근사한 요리가 되어주지 못한다. 작은 고기 조각은 돈가스나 탕수육, 소고기 뭇국을 되지 못한다. 팬에 지글지글 구워 먹지도 못한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하루 중 떨어져 나간 그 한 점의 고기를 뭉치고 뭉치면, 함박 스테이크가 된다는 사실을. 나는 떨어져 나간 나의 시간들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들끼리 잘 놀 땐 잠시 책을 읽었다. 둘째와 산책하다 만난 풍경과 사람들을 보면 메모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티브이를 볼 때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남편이 아이들과 놀고 있을 땐 책을 읽거나 메모를 했다. 그러다 보니 고기 패티는 조금씩 커지고 있어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결국 나는 또 다른 결심을 하게 된다. 새벽 4시 기상. 미라클 모닝! 잘게 잘린 시간만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읽고, 쓰기 위한 시간 확보가 필요했다. 생활 리듬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5초의 법칙을 적용했다. 정해진 시간이 되면, 마음속으로 5초를 샌다. 5초가 끝나자마자 동시에 몸을 일으킨다. 두 발로 게으른 내 생각의 벽을 걷어찬다. 새벽을 연다.


벌떡 일어나 나의 자리로 간다. 4인 가구 평균에 딱 맞는 평수의 우리 집에서 나만의 공간이 있을 리 없다. 한동안 나는 나의 자리를 찾아다녔다. 보통 엄마들은 부엌에 있는 식탁을 활용하지만, 나는 오픈된 공간이 맘에 들지 않았다. 가끔 남편이 등장해 나의 집중력을 깨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막감이 감도는 그 공기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결국 내가 찾은 곳은 우리 집 안방에서 화장실로 가는 짧은 통로이다. 이 공간에선 두 아이가 평온하게 잠든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이제 30개월이 넘은 둘째가 뒤척이다 엄마를 불러도 바로 달려갈 수 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적합한 공간이다.

작지만 소박한 나만의 공간
해 뜰 때까지 푹 자려무나. 엄마 좀 살자


새벽 시간 동안 나의 지난 시절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나'라는 간이역에 무수히 정차했던 음악들과 책들을 떠올린다. 그들이 나를 찾아줄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내 마음은 얼마나 충만했던가. '에드먼드 단테스'(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주요 인물)와 '앤 셜리', '히드클리프' 가 간이역에서 내려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나는 그들을 잡기 위해 얼마나 뛰었던가. 그 시절이 다시 내게 왔다.  '댈러웨이 부인'과 '아울렐리노 부엔디아(백 년의 고독에 나오는 인물)'이 역에서 내려 돌아다닌다. 이젠 뛰지 않고 응시한다. 관찰한다. 많은 손님들이 찾을 수 있게 역사의 규모도 넓히고 있다. 화장대 수납장에 차곡차곡 책이 쌓인다. 나는 잊고 있었다. 독서가 곧 나임을, 나를 증명해주는 것이 곧 독서라는 사실을. 그렇게 나는 새벽 독서의 루틴을 만들었다.



읽고 쓰는 인간의 욕구, 그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다.

읽고 나니 쓰고 싶어 졌다. 직업상 많은 글들을 써왔지만, 다 남을 위한 글들이었다. 진정 나다운 글을 없었다. 시간과 공간까지 확보하자 나는 글쓰기에 빠지게 되었다.  나의 글 실력을 보면서 처음엔 절망과 희망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이제는 평화롭다. 내가 나는 나다워지고 있다는 걸 몸소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읽고 쓰는 삶은 내가 꿈꾸는 일상이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나다워진다는 건 '행복하다'는 또 다른 표현이었다. 다시 한번 명심한다.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들도 행복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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