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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Oct 05. 2020

잘 살아보자는데 왜 눈물이 날까

고독고독하다 보면 고독해지겠지

남편과 차를 타고 간다. 남편은 화가 많이 나있다. 일하다가 힘들게 집에 들어왔는데 나의 표정이 어두웠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그러려니 하며 웃으면서 넘어갈 수 없냐는 의미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아이들이 뒤에 타고 있는데도 화를 계속 낸다. 남편의 화는 과속방지턱의 높이만큼 덜컹댄다. 급격한 경사를 만들 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내 몸을 가만 두지 않는다. 내 심장에선 굉음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나는 울먹이고 있다.


“밖에서 생기는 일은 내가 어떻게든 다 해결하잖아.

 그러니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좀 잘해봐”


남편과 함께 일을 하면서 나는 꽤나 벅찬 하루를 보내고 있다. 육아와 일을 동시에 하는데 중요한 건 남편은 한 달 중 며칠을 제외하고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서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남편은 바쁘다. 일이 많기도 하고,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남편은 일에 파묻혀 지내고 있다. 그 덕에 나는 두 아들을 도맡아 해야 한다. 두 아이를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밤에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당연하다. 워킹 맘은 힘들다. 그나마 나가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라도 제공되니 일의 펑크를 메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주어진다. 하지만 대부분 재택근무로 시간을 보내는 나의 경우, 컨디션에 따라 일의 성과가 엄청나게 큰 차이를 보인다. 컨디션이 나쁘면, 당장 코앞에 닥친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1시간이면 해도 될 일이 두 배 이상 걸리기도 한다.


문제는 기댈 때가 없다는 것. 나는 나의 머리를 기댈 어깨가 필요했나 보다. 남편은 없으니, 나에겐 시간도 체력도 없다. 대신 심심하다 외치는 아들들의 불평불만만 쌓인다. 더불어 내 속이 화도 커지고, 목소리도 높아진다. 육아와 일이 분리되지 못하면서 빈번하게 나의 화가 넘치고 있는 것이다. 화의 분출구를 막아야 하는데 솔직히 어렵다. 처음엔 손가락으로 막으면 될 화들이 점점 넘치기 시작해 온 몸으로 방어해도 부족할 때가 있다. 그래서 가끔 멀리 사는 언니를 부른다. 이것도 미안하긴 마찬가지이다. 


추석 연휴 내내 친정에 가있었다.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열은 나지 않는데 무기력증과 두통에 시달렸다. 코로나를 의심할 정도로 나는 컨디션 난조를 보였다. 집에 와서는 더더욱 아팠다. 열병처럼 나는 두통에 시달렸고, 원인을 알지 못했다. 어쩌면 속으로 괜찮다고 외치지만, 버틸 수 있다고 최면을 걸고 있지만, 나의 몸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건 아닐까?


“다 차려놓은 밥상, 다른 사람한테 넘기기 아깝잖아”


함께 벌면 어찌 됐든 좋은 거니 함께 버텨보자고 하는 남편의 말에, 나는 수긍하면서도 눈물을 흘렀다. 그 물의 온도는 꽤나 뜨거웠다. 100도에 가까운 온도에서 끓다가 나온 것 같은 그 뜨거움. 내 얼굴이 타들어갈 정도의 고통스러운 눈물이다. 잘 살아보자고 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반사적인 눈물의 의미는 뭘까? 나는 이 고비를 넘기면 분명 좋은 신호가 올 거란 걸 안다. 그래서 버티고 있다는 것쯤은 이제 알 수 있는 연배가 되었다. 그럼에도 눈물이 난다. 눈물의 의미는 바로 ‘고독’에서 기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칭얼대거나 누군가에게 기대기엔 나는 커버렸다. 이제는 홀로 고독하게 성장해야 함을 안다. 곁에 있다고 해서 연애하듯 기대려던 나의 습성이 깨지고 있는 순간이다.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나기 위해 나는 홀로 서야 한다. 그리고 나를 지지해주는 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것을. 고독이 주는 깊은 메시지 말고는 내가 버틸 구석이라곤 온 세상 탈탈 털어 나오지 않는다는, 깊은 깨달음의 눈물이다.


어느 순간, 나이를 먹으면 눈물은 기하급수적으로 급증한다. 마흔 중반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눈물을 머금고 산다. 어떤 현상에도 나의 눈은 반사적으로 뜨겁게 반응한다. 그리고 이내 눈물로 흐른다. 내가 고독하다는 증거이다. 이는 일상적인 반응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도 했다. 결과에 연연하다 보면 더욱더 고독해질 뿐. 나는 적당한 고독에 순응하며 살기로 했다.


아이들의 주는 기쁨 뒤에 오는 고독, 남편과의 대화 도중 불쑥 튀어나오는 고독, 홀로 꿈속을 헤매다 느끼는 고독. 친구와 통화하다 느끼는 고독, 그 실체. 지독한 고독의 시절, 그 이후 나는 뭐가 되어있을까? 뭐라도 되어있을까? 생을 시시하게 살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한 나의 고독은 오늘 또 어느 순간, 불시에 튀어나와 나를 울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울음에 나는 또 얼마나 초연해질 것인가. 매일매일 나를 관찰하듯 나는 나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기로 결심해본다.


고독고독하다 보면 고독해지겠지만,

고독을 받아들이면 생이 단순해진다.


인간은 누구나 고독하다는,

이 단순한 명제에 도달하기까지 나는 얼마나 고독했나

그리고 앞으로 또 얼마나 고독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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