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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의 기억은 촉각으로 남는다

촉각이 일깨워주는 여행자의 감각에 대하여

by 델리러브

길을 나선다. 이번에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배낭의 어깨 끈을 다시 조인다. 적당한 무게감을 주는 배낭 안엔 적당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다. 까칠하지만 적당한 포근함이 있는 그런 재질이다. 그것이 나의 배낭이 가진 속성이다. 까칠해서 어떤 바닥에 내려놔도 툴툴 먼지를 털면, 원상태가 된다. 기차에서나 여행 도중 의자가 필요할 때 나의 배낭은 기꺼이 제 몸은 다 내어준다. 적당한 포근함을 만들어 준다. 하여, 나는 배낭을 베개 삼아, 칸막이 삼아 여러 여행을 즐겼다.



여행지를 선택할 때 나는 촉각이 중요하다. 촉각은 곧 여행자가 그곳에 처음 닿았을 때부터 감지했던 어떤 감각이다. 무게감일 수도 있고, 그 도시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의 방식일 수도 있다. 나는 촉각이 다양한 곳으로 떠나는 걸 즐긴다. 어떤 곳은 물먹은 습자지 같기도 하고, 어떤 곳은 실크를 표방한 레이온처럼 흐느적거리기도 한다. 때론 오전엔 빳빳한 리넨 재질이었다가, 오후에는 보풀이 일어나는 폴리에스테르의 다소 까끌까끌한 소재로 바뀌기도 한다. 그 원인이 나는 '공기' 때문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공기는 흐르고 있지만 순환한다. 돌고 돌아 항상 그 자리를 지키는 공기는 오랜 시간, 그곳을 지켜왔다. 따라서 공기가 가진 속성이 여행지의 표면이 된다. 그 표면은 어떤 재질이냐에 따라 여행자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인상을 남긴다.



룩소르는 까칠했다. 낮 동안 그 지역의 공기들은 서서히 내 목을 조여왔다. 나는 꼴 딱 꼴 딱 침을 넘겨가면서 물에 의존했다. 유적지 근처에만 가면 멀미가 나올 지경이다. 어쩌면 아직도 그곳엔 파라오나 네페르티티 등 이집트 왕가들이 그곳에 사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너무 많은 공기들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흡사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그 부조들은 나를 섬뜩하게 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지만, 이곳 공기의 주인은 그들이었다. 수천 년 전에 살았던 왕들은 여전히 지하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 상상은 그럴싸했다. 분명 여러 개의 눈들이 신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 신전의 재질은 뭐라 말할 수 없지만, 과묵한 암막 커튼 같았다. 그 커튼을 걷는 순간, 과거 왕들의 향연이 펼쳐질 것 같았다.



그날같이 여행 온 언니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마치 밀폐용기의 뚜껑이 열린 것처럼. 언니는 콜라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나와 친구는 그러라고 했고, 언니는 같이 마시자고 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생존을 위해 이곳에서 필요한 건 생수 한 병이면 충분하다고. 나는 마시지 않겠다고 했고, 친구는 망설였다. 언니는 결국 콜라를 샀다. 우리 관계로 그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낮 시간, 텅 빈 룩소르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멀리서 빨간 티셔츠를 입은 현재인 만두가 아는 척한다. 그는 이 밀폐용기 안 과거 속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 생존을 위해 그의 허파는 두세 개가 될지도 모른다.



이 소도시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당한 거리감이었다.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새 멀어지는 기분이 든다. 각자 속마음으로는 혼자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각자의 밀폐용기 안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 온 건지도 모른다. 일단 언니는 다음날 여행을 하루 쉬겠다고 선언했다. 언니에게 필요한 건 그리스 산토리니를 연상케 하는 시원한 리넨 소재의 하루일지도 모른다. 부득이하게 이곳에서 그런 공기를 제공해 주는 곳은 그나마 숙소이다.



언니와 떨어져 친구와 나는 조용히 신전을 둘러봤다. 그러다 자칭 신전 가이드라는 늙은 남성의 접근에 넘어가버렸다. 호기심으로 그의 접근을 용인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었다. 소소하지만, 무겁지 않은 얘기들이 공기 중으로 내뱉어진다. 어떤 것은 나오는 순간, 산패되어 나까지 오다가 상하기도 한다. 나는 소화시키지 못한 이집션의 영어를 적당히 웃어가며 응수한다. 어차피 나의 언어가 그의 언어에 전달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서로의 제스처를 통해 반응을 살핀다. 모든 설명이 끝난 후, 우리는 그에게 가이드 비를 주고, 팁을 올려줬다. 악수를 한 그의 손은 땀으로 젖어있었지만 매끈했다. 그 매끈한 느낌은 나에게 어떤 일말의 고민도 없이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이집션들의 현재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 여행을 생각하면, 애잔하면서도 사막의 비를 떠올리듯 촉촉하다. 무겁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습한 곳에 가면, 나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이 오른다. 5일간 내가 맥그로드 간즈를 떠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숙소는 다행히 그나마 건조했다. 하지만 이미 습기에 제압당한 이불이 숨을 조인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숙소에 홀로 있을 수가 없다. 티베트인들은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 소도시에서 생을 이어가고 있다. 마니차를 돌리고, 모모를 빚고, 기도를 하고, 참파를 먹는다. 특히 참파는 우리나라의 미숫가루와 비슷한데 이 보릿가루에 물이나 버터 차에 뿌려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다져 먹는 게 이들의 식사다. 단출하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단출한 음식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먹다 보면 목이 막힌다. 거칠어서 입안이 까슬까슬해진다. 시간이 많이 요하는 작업이다. 이를 먹는 것 역시 수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이곳 사람들은 모두 수행 중인 것 같다.



공기가 점점 습해진다. 빨래는 마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비가 오는 건 아니다. 어쩌면 속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라를 잃어도 티베트인들의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만난 롭쌍도 내게 항상 웃어줬다. 티베트 집안에서는 한 명의 라마가 나와야 한다고 한다. 보통 첫째가 라마가 되는데 자기 집에선 자신이 라마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얼마 후면 공부를 하러 뱅가로르로 떠날 예정이라고 한다. 가끔 내가 가면, 차를 대접했다. 몸도 마음도 성치 않은 나는 친구라도 만난 것처럼 그가 고마웠다.



떠나기 전날, 그에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손가락으로 뜨개질한 방석을 선물했다. 그는 울컥했다. 정말 소나기라도 내릴 듯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다음날 나를 배웅해 주러 정류장에 등장했다. 온갖 티베트 관련 기념품들도 가득 준비해서 왔다.


혼자 떠나면, 모든 걸 혼자 해야 한다. 혼자 시작하고 혼자 마무리하고. 누군가 나를 배웅해 준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그날 롭쌍의 배웅을 받으며 안전하게 그 도시를 빠져나왔다. 습기 찬 물속에 갇혀있다가 갑자기 텅 빈 들판에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그와 함께 이어폰을 한쪽씩 꽂고 들은 콜드 플레이의 'In my place'를 가끔 접할 때마다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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