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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yet Oct 09. 2024

오래전 그날의 기록.



가볍고, 뜨거운 무언가.



문득, 그리움에 대한 끈적한 생각을 해 본다.


얼마 전, 한 줄의 메모가 잊혀진 기억을 소환해냈다. 


'아직 안녕하신가요? '


고작 바위덩어리나 보자고 떠난 여행이었다. 상하이 푸동 공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기체가 흔들릴 때 마다 가볍고, 뜨거운 무언가를 토해내야만 했다. 


꾀나 진득하게 쓰여진 텍스트와 꺼내지 못했던 마음이 뒤엉켜 있었다. 그날 따라 크게 할 일도 없고 해서, 굳이 들춰 본거다.




멜버른 공항, 얼마 지나지 않아 K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푸동 공항에서 연락하겠다고 옆에 앉은 H에게 전했다. 그는 이해하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K와 이야기를 나눴다.


나라는 사람은 헤어짐 앞에서 늘 긴장한다. 이별이 미숙한채로 어른이 된 것이다.


비행기가 뜨기 전 K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마음이 아려서 받아야만 했다. 그는 보고 싶다고 말했다. 돌아서자마자 보고 싶어졌다고. 나는 ‘나도’라고만 답했다.


‘나도 너무 보고 싶어’라고 늘어놓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가끔씩은 꺼내 버리면 소멸할 것 같은 말들이 있는데, 그날이 그랬다. -지난 일기 중 일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그리움’을 남긴다.


함께 본 별들의 향연도, 추적추적 비 내리던 거리도, 야라강의 불빛과 음악 소리도 이제는 지나간 *찰나(刹那)가 되었다.

*찰나는 고대 인도의 가장 짧은 시간 단위로 지금 시간으로는 1초의 75분의 1일인 0.013초다.


지금 우리는 이곳에 존재하고, 그날의 그들은 거기에 남겨졌다. 그리움이 만들어낸 시공간 속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서글픈 우리가 여기 있을 뿐이다.



이런 글을 남기면, 누군가 그를 사랑했냐고 묻을 수도 있겠다. 이상하게도 사랑이라는 정직한 단어를 꺼내 쓰면 젤 것 없이 한정된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의 형태가 하나뿐은 아닐텐데, 마치 가로세로가 정해진 수학 공식처럼 말이다.


그 순간을 사랑했을 뿐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분명 같은 사랑을 했고, 다르게 사랑하지 않았던거다. 사막의 핑크빛 하늘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도 그 어디쯤 있었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멜버른 동물원에 갔다. 숨막히는 더위 속에서 잔디밭을 찾아 잠시 쉬었다. 초록이 가득하고, 뛰어노는 아이들 웃음소리가 눈부셨다. 햇살은 기억 속에 담고, 흐르던 주변 소음은 핸드폰 속에 녹음해 두었다.(나는 여행지에서 소음을 녹음을 하는 습관이 있다.)


'어차피 그리워질 것.'이라는 싱거운 메모와 함께.



언제부터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특별한 순간을 녹음하는 버릇이 생겼다. 어릴때는 지워지지 않는게 많아 힘들었는데, 어느새 소중한 기억이 잊혀질까봐 두려운 나이가 된 거다. 

K는 우리가 다시 다른 곳을 여행하게 될 거라고 확신했지만, 나는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짐작했다.


인생은 늘 제멋대로 동선을 짠다. 가끔은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도착하고 나서야 그곳이 어디인지 알아챌 만큼 정신없이 걷게 만든다.



고요 속에 쏟아지는 별을 보는 일도, 이른 아침 맛있는 브런치를 함께 먹는 일도, 밤 새 소근거렸던 그 할 일 없음도. 다시 만나지 못할 사치라는 걸 알기에.


어쩌면 흔하지 않은 기억으로 간직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떠날 수 없을 것 같다. 가만히 두어야 남겨질 것 같은 미련한 마음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K의 말대로 또 모를 일이다. 무모하게 짐을 꾸리며, ‘내가 미쳤나 봐’를 반복하고 있을지도.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그리움’을 남긴다.


필요 이상으로 유별났던 핑크빛 하늘은 그날 이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리운가 보다. 하나 뿐이거나 이미 지나버린 것, 가질 수 없는 것들은 쓸모없이 그립다.



지금 우리는 각자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끔은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낯설게 느껴지지만, 그 순간을 사랑했기에 그리운건 분명하다.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아득하고, 형태없는 그리움을 밀어낼 방법을 나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그때 그의 말대로,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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