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이 지나버린, 마지막 지점을 향해 쓰러지는 꽃을 좋아한다.
절정의 순간을 이제 막 지나는, 어쩌면 여전히 살아있는 꽃.
그 뜨거움과 짙은 향기는 애송이 시절에는 가질 수 없는 고혹한 모습이다.
푸르고 신선한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보송보송 여린 것들은 이상하게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도 나는 유별나게 지는 꽃을 좋아한다.
이미 시들어 아래로 추락한 꽃이 아니라, 환희의 순간을 품은 채 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살아있는 꽃 말이다.
둘 곳 없는 나의 시선은 초록잎과 만개한 꽃 사이 힘을 잃어가는 연약한 존재에 자주 머문다.
지난 바람과 비, 햇살을 기억하고, 어디로 갈지도 짐작하고 있는 그 담담함.
그래서일까, 꽃은 활짝 피었을 때보다 질 때 더 진한 색과 향기를 보낸다.
인위적으로 만든 물건들은 낡을수록 빛이 바래지지만, 꽃은 시들어 갈 때 짙어지니 영문을 모르겠다.
사람도 그럴까,
나도 그럴까.
우수수 떨어진 꽃잎들은 제 할 일을 모두 마친 듯 편안해 보인다.
이제 몸에 남은 수분은 빼는 일만 남았다.
바싹 말라버린 꽃잎은 잔바람에도 가볍게 사방으로 흩어진다. 생에 첫 비행(悲行)이다.
계절이 바뀌면 다시 싹이 나고, 하늘거리는 꽃잎을 터트리겠지만 지난 그 꽃이 아니다.
당나라 두보의 시 ‘곡강’의 첫 구절에 인생 칠십 고래희(人生 七十 古來稀)’라는 말이 나온다.
과거에는 70세까지 사는 일이 드물었기에 ‘매우 기쁜 일’이라며 이때 고희연을 열었다고 한다.
요즘 70세면 청년이라는 말도 있지만, 나이 들어 가는 것을 보며 마냥 기뻐할 수 있을까.
엄마는 길을 걷다 할미꽃을 보면 반가워했다. 칙칙한 자줏빛에 하얀 털이 숭숭난 볼 품 없는 꽃.
심지어 고개까지 푹 처박은 채 존재감 없이 숨어 있는데 뭐가 좋나 싶었다.
인생의 아름다운 날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일까.
날짜를 정해놓고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쩌면 자신이 아는 만큼만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 수도 있다. 모르는 것을 느낄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느낀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갖는 능력이다.
이제서야 엄마도, 엄마의 할미꽃도 아름답게 보이는 걸 보면 나의 아름다운 시간이 조금 더 늘어난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메모 향수의 창립자인 존 몰로이의 강연에 다녀왔다. 여러 가지 인상적인 이야기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향을 좋아하고 예민한 코를 가진 사람들이 주로 조향사가 되는데, 이들 중에 향기를 맡는 것을 넘어 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단다.
향기를 볼 수 있다는 것,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메모'는 향수와 함께 예쁜 일러스트 삽화집을 함께 낸다고 한다.
지는 꽃의 향기를 맡으면 피어 있는 동안 보고 기억했던 장면들이 향수처럼 흐른다.
맥락 없이 피고 지는 것이 아니다.
하얗게 순수하고, 붉게 뜨겁거나 노랗게 싱그러웠던 순간들을 간직하고 스스로 끝을 향해 비처럼 내리는 존재다.
그의 말을 빌려 나도 '지는 꽃의 향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신기하게도 벚꽃 나무의 수명은 사람과 같다고 한다. 과거 사람의 평균 수명이 65세 정도 일 때는 벚꽃 나무도 65년을 살았고, 75세로 늘어나자 그만큼 더 살게 되었다고.
사람과 생의 보폭을 맞추며 살아가려는 걸까.
마지막을 알면서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세상의 모든 꽃들처럼 하염없을 일이다.
요란하게 핀 꽃들 사이 야위고 매말라 짙은 향기만 남은 황혼의 꽃.
그 수척함을 모른 척 할 수 없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훗날 세상이 어떤 사람으로 당신을 기억해 주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여러 소문들 중 지는 꽃 사진을 유별나게 잘 찍는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드문드문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