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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t yet Oct 09. 2024

비가 지닌 멜랑꼴리.


Melancholy.


감성이 짙다는 건 어떤 걸까.


노랗고 빨간 것을 구분하는 것일까, 늦은 밤 친구에게 전화해 이유 없이 슬프다고 말하는 영혼일까. 어쩌면, 인적이 드문 뷰 맛집을 찾아내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서울의 눈오는 밤)


기차나 버스를 탈 때도 해가 어느 쪽으로 지는지 확인하거나, 라떼의 하트 거품이 깨질까 봐 조심스레 마시는 사람 정도면 짙은 감성의 소유자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자면, 비를 기다리는 ‘멜랑꼴리’한 마음이 아닐까.


(후쿠오카의 비 내리는 도로)


오늘은 비가 왔다. 실은 어젯밤부터 내린 비다. 그렇다고 어제와 같은 비는 아니다.


어릴 적부터 비 오는 날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이상하게도 비 오는 날은 나가 놀고 싶고, 맑고 날은 틀어박혀 열심히 일하고 싶어진다.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 무슨 변태 같은 소리냐고 반응하지만.


그렇다고 매일 비가 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다. 손에 비닐봉지 하나도 들기 싫은데, 우산에 가방까지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건 번거롭고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필리핀의 어느 도로)


하지만 손편지나, 모카포트, 태엽 감는 오르골처럼 아날로그적이고 감성 짙은 것들에는 어느정도 불편함이 스며있다.(그간 고가의 모카포트 2개를 천국으로 보낸 경험이 있는데, 세제로 씻으면 안 된다는 것을 얼마전 알게 되었다.)


(대구의 비오는 저녁)


비는 멜랑꼴리(melancholy)를 데려온다. 그럴때면 괜스레 기분이 울적하고, 애매한 느낌이 든다. 몸 구석구석이 수분을 먹어서인지 묵직하고, 느려진다.


햇살이나 비, 눈처럼 대부분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들은 긴장을 풀고 느슨하게 만드는 힘을 지녔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놀고 싶은 건 비가 지닌 느슨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 어느 공원의 눈)


그래도 대부분의 비는 친절하다. 등장하기 전 예고편이라도 보여주듯 하늘과 거리, 바다를 회색으로 물들인다. 감성이 이성을 덮어버리는 순간이 된다. 들뜬 피부 마저도 차분해지는데, 누군가 나지막이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서두르지 말고 침착해, 침착해.’


(말레이지아 어느 바다)


타고난 조증인 나에게 비의 물성은 밸런스를 맞춰주는 신비의 물약이 되어준다.


어릴 때는 늦지 않게 적당한 비가 내려주길 간절히 바랐다. 우산을 씌워줄 사람도, 쓸만한 우산도 없다며 원망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게 있듯이, 비가 오고 그치는 것은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더 이상 누군가 우산을 씌워주길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마음에 드는 우산을 하나둘씩 장만한다. 세월은 나를 사치스럽게 만들었나 보다. 옷을 갈아입듯 기분에 따라 우산을 챙겨드는걸 보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건 우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비 내리는 피크닉, 사울 레이터 전시)


나를 감성 짙게 만드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가지고 싶은 ‘유별남’,
흔한 것 사이에서 흔하지 않은 것을 찾아내는 ‘애매함’,

그리고 색색의 우산을 준비하고, 비가 오길 기다리는 ‘멜랑꼴리’이다.


코코아에 마시멜로가 떠 있으면 마음이 몰랑해지듯, 팍팍한 삶을 감성 짙게 만들려면 첨가제가 필요하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에게 우산은 마시멜로가 되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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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을 살 때 여러가지 조건이 있는데 무엇보다 작고 가벼워야 한다는거다. 제 아무리 예뻐도 무거우면 집에 고이 모셔두게 된다.


얼마전 구매한 워터프론트의 아주 납작한 보라색 우산


우산의 색깔은 매력 포인트가 된다. 나는 주로 보라색과 파랑색, 빨간색처럼 자기주장이 강한 컬러를 좋아한다.


장우산 보다는 2단을, 2단 보다는 3단을 사는 편이다. 실은 장우산을 여러번 시도했으나 매 번 잊어버리곤 했다. 기다란 녀석이 어찌나 잘도 숨는지.


애정하는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그려진 빨간 우산, 환기 미술관에서 샀다.


어지간해서는 투명 우산을 사지 않는다. 나에게 우산은 비를 가려주는 것뿐만 아니라 얼굴을 가려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비가 많이 오는 장마철에는 어쩔 수 없이 튼튼한 장우산이나 우비를 챙긴다. 그외에는 대부분 강한 바람에 날아가 버릴 정도의 연약한 우산을 선호한다.


다른 이유 보다는 무조건 무게와 부피 때문이다. 보부상처럼 이것저것 챙기는 성격이다 보니 우산의 몸무게와 덩치가 매우 중요하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습관처럼 초경량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데, 햇빛이 강한 날에는 양산이 되어준다. 가끔은 일기예보가 맞지 않거나 여우비가 내려주길 바라기도 한다. 가방안에는 언제나 우산이 함께 하기에 비를 맞을 걱정 따위는 없는 것이다.


일본 여행에서 산 워터프론트의 초경량 파랑 우산


다이소표 검정우산, 파랑색 워터프론트 우산과 같이 데일리용 예비 우산이다.


엄마가 사주신  피에르 가르뎅 양우산, 겉은 꽃무늬이고 안쪽은 코팅된 까만색이다.


우산집은 손잡이 끈에 매달아 두고, 젖은 상태에서 가방에 넣어야 할 때만 풀어서 씌워준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용한 후에는 꼭 펴서 말려야 한다. 비에 강한 우산이지만 그냥 두면 이내 녹이 쓸고 만다.


명품이나 값비싼 제품들은 아니지만 모두 구매한 곳이나 선물 받은 날을 기억할 정도로 단순한 물건이 아닌, 깊게 애정하는 친구들이다.


가끔씩 체크 옷이 입고 싶듯, 우산도 그럴때가 있다. 노란색 형광 손잡이에 체크 무늬 우산.


키스 해링의 보라색 우산


오래전 가장 친했던 친구가 오사카 여행에서 사 준 양우산
이제는 연락을 끊은 사이지만, 우산을 쓸 때 마다 그 친구가 생각이 난다.


일본 도쿄에서 산 개구리 모양 손잡이의 파란 우산.


이쯤에서, 당신은 어떤 우산을 쓰는지 궁금해진다.

장우산을 좋아하는지, 빨간 우산을 가졌는지,


당신에게 어떤 멜랑꼴리가 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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