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숨이 막힐 것 같은 순간이 있다.
공황장애나 고쳐지지 않는 성질머리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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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에 늦어 지나가는 택시를 급하게 잡아탔다.
천천히 와도 괜찮다는 상대의 연락을 받고서야 편히 등을 대고 앉을 수 있었다.
라디오에서 몇 년 전 즐겨 듣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덩어리진 무언가가 훅 치고 올라와 기도를 막는 듯 했다.
그 노래다.
잊고 있었어, 이 노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노래는 늙지도 않고 그대로인데, 나는 유행가 같은 건 듣지 않는 건조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도 모든 노래 가사가 내 이야기 같던 시절이 있었다. 카페나 거리에서 애창곡이 흐르면 이것 마저도 운명이라 믿었다.
좋아하는 곡만 모아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고,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노랫소리에 잠들곤 했다.
뜨겁게 애 태우던 시절, 절절한 사랑 노래 하나 없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누군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걸 알듯이, 유행가 가사가 더이상 나를 위한 시가 아니라는 것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가수는 자신이 부르는 노래대로 산다던데, 나의 애창곡은 나와 별개로 살고 있더라.
택시는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고, 노래도 쉽사리 흘러가 버렸다.
한 때, 핸드폰 컬러링이 유행이었다. 전화를 걸면 들려오는 노래로 상대의 취향을 알 수 있었다.
어떤 날은 노래가 너무 좋아서 상대가 늦게 전화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오랜만에 전화해 잘 지내는지 묻고 싶은 친구가 있다.
그에게 전화를 걸면 늘 좋은 음악이 흐르곤 했다. 그가 그리운건지, 그의 노래가 그리운건지 모르겠다.
아니다, 그립다는 말로 담아두기에는 복잡한 마음이다.
그는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는데, 여전히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혹은 누군가의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
아직도 긴장하면 손톱을 깨물고, 어깨는 얼어붙어 한 없이 올라가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막상 전화를 걸면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또 잘 지낸다면 서운할 것 같고, 못 지낸다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그저 그렇다고 하면 괜히 전화를 했나 싶을 테고.
결국, 연락하지 못한다.
철지난 노래가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이병률 작가의 글처럼, 그저 각자의 자리에서
‘어지간히 따로가' 아름답기를 바랄 수 밖에.
‘여기까지’인 게 많은 삶을 살고 있다.
애절하게 그리워하거나 무언가를 자꾸 좋아해서도, 누군가와 속없이 나눠서도 안되는,
여기까지.
그걸 알면서도, 또 알아채는 순간 숨이 막혀온다.
이제껏 가진 사람 보다 잃은 이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도.
앞으로 만날 사람이 지금보다 훨씬 적을 거라는 걸 눈치챌 때도 삶이 먹먹해진다.
하긴 매일 잃고, 지우고, 버려도 남겨진 게 있어서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벚꽃 시즌이 돌아왔다.
고상하게 핀 목련이 떨어질 무렵이면 하얀 꽃눈이 세상을 뒤 덮는다.
송이송이 맺힌 벚꽃이 봄바람에 흩날린다. 아이스크림 처럼 당장이라도 녹아버릴 것 같아서, 아무개 손이라도 잡고 벚꽃길을 걸어야만 할 것 같다.
어쩌자고 이렇게 예뻐서, 가만히 바라보게 만드는걸까.
잊혀진 노래를 예고 없이 듣거나, 여기까지를 온몸으로 알아 차릴 때.
그리고,
어지간히 따로가 아름다운 무언가를 바라볼 때.
아무 병도 없이 멀쩡하게 숨이 막혀오곤 한다.
숨을 쉬고, 살기 위해.
그대는 그 봄에 두고,
나는 이곳에서 오늘 핀 꽃 만큼만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