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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성 Sep 04. 2024

엄마는 죽었다

부르지 않는 그 이름

대여섯 살쯤 때 종종 엄마에 대해 물으면 할머니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그걸 몇 번 반복하다 짜증이 난 건지 지겨웠던 건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더 이상 엄마에 대해 묻지 않길 원했던 것은 확실했고 마지막 대답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충분했다.


"네 엄마 죽었다."


이후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는 죽었구나. 슬프다.'라고 생각하며 엄마는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닌 어쩔 수 없이 볼 수 없는 존재라고, 날 보러 오지 않는 게 아니라 볼 수가 없는 거라고 여겼다. 어린 마음은 엄마가 안타깝고 불쌍한 가운데 '엄마는 날 버린 게 아니구나.'라고 생각하곤 이내 다행스러움마저 느꼈다.


나는 그렇게 엄마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정확히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MBTI N과 S 중 N인 나는 상상을 잘한다. '만약에'도 좋아한다. 그러나 가족에 대해서 '만약'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만약 정말로 엄마가 돌아가신 거였다면 어땠을까. 두 사람이 사별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해볼까. 그랬더라면 상황이 좀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이 불쌍했을 것이다. 나도, 할머니도, 아빠도, 엄마도.


세상에 좋은 이별은 없다는 것을 안다. 해일처럼 닥쳐오는 이별을 피할 수도 없다. 할 수밖에 없으면 해야 하는 것이 이별이기에 헤어짐을 말리지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못 박고 싶지도 않다. 다만, 책임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부모의 이별로 어디에도 붙지 못한 자녀는 삶이 곧 불안이다. 불안의 시작은 분리이다.


분리되어 살아온 나는 평생을 불안과 함께 살았고, 겉으로 괜찮은 척 웃으며 살다가 서른 살에 병이 났다.

결국 가족과의 불화가 불씨가 되어 폭탄이 터졌다. 언젠가 있을 일이었다.


이혼이 쏘아 올린 공이 눈덩이처럼 커져 가시를 달고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찔러댄 것이다.


나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이 얘긴, 이혼 가정에서 자랐지만 상처를 받지 않고 컸거나 아픔을 극복하고 잘 살고 있다는 훈훈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직 분노가 가득한 어느 젊은 인간의 날카롭고 차가운 넋두리 혹은 회포이다.

 

지금부터 서른두 살이 된 지금도 내 입으로 꺼낼 수 없는, 꺼내려고 하면 왈칵 눈물이 쏟아져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이야기를 어렵게 글로 써내려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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