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나이 든 몸으로 나를 씻기고 먹이고 재웠으며, 학교에 보냈다. 한 달에 한 번씩 돌아오는 급식실 조리 당번도 왔었다. 등교 시간에 맞춰 새벽같이 밥을 했고 나를 깨웠다. 아침밥을 빠뜨리는 적이 없었다. 기관지가 안 좋아 기침을 많이 할 때면 수세미나 선인장을 달인 물을 먹였다. 구토가 나올 만큼 먹기 싫었지만 효과는 좋았다.
수능 날엔 서툰 솜씨와 없는 재료로 김밥을 싸줬다. 어떤 일에도 내가 우선이었다. 고모들이 "네 할머니는 너밖에 없어."라고 질투 섞인 볼멘소리를 할 정도였다. 그녀의 노력과 희생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래 봤자였다. 결국에 그녀와 난 어긋났고, 끊어졌다.
화병
화병은 신체증상을 동반하는 우울증으로, 우울감, 식욕저하, 불면 등의 우울증상 외에도, 호흡곤란이나 심계항진, 몸 전체의 통증 또는 명치에 뭔가 걸려 있는 느낌 등의 신체 증상이 동반되어 나타난다. 환자가 자신의 우울과 분노를 억누르고, 그 억압된 분노가 신체증상으로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화병'이라는 것은 가슴속 응어리, 화가 많은 사람들이 그 '화'라는 것과 '질병'을 합쳐 만들어낸 이름 없는 야매 병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내가 알기로 예전에는 화병이라는 병의 정의가 없었던 걸로 안다.(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은 정확히 명명되어 있는 질병이며 의료계 종사자인 나는 일찍이 그걸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고 새로운 선생님, 새로운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하게 됐다. 여전히 난 자신감 없는 아이였으며 공부는 잘하지만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아, 중학교 내내 날 좋아했던 남자 애 때문에 원치 않게 종종 주목을 받긴 했다.
원체 조용하고 말이 없고 소심했던지라 화가 나도 화난다고 말도 안 하고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그런 감정을 표현해서 관심을 받는 게 싫었고 내 그런 감정을 상대방이 알게 되었을 때 봐야 할 반응도 두려웠다. 그래서 마음이 늘 가라앉아 있고 한 구석에 답답함도 있었는데, 거기에 우울한 감정까지 보태준 이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러지 않다가 내가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이 될 무렵 좋지 않은 일이 생기거나 문득문득 화가 나면 나를 향해 그 감정 상태를 말로 쏟아붓기 시작했다. 소위 말해 나는 감정 쓰레기통이 된 것이다. 특히 자식들과 트러블이 생기거나 핀트가 상하는 일이 있을 때, 그 자식들 중 아빠에게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생겼을 때 옆에 있는 내게 온갖 짜증을 부렸다. 아직도 선명히 기억하는 어떤 날에는 방바닥에 드러누워 팔과 다리를 쭉 펴고 몸을 세차게 흔들며 울며불며 소리를 쳤다. 자기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마구 때리기도 했다. 나는 그 행동의 전부를 눈앞에서 똑똑히 봤다. 오롯이 혼자 그 광경을 봤다. 충격적이었다.
할머니는 큰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해남에 있는 정신병원이었다. 그녀는 화병이자 우울증이었다. 그때부터 그녀는 주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우울증 약을 타왔다. 그 뒤로 감정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지는 일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나였다. 나는 미치도록 불안하고 겁이 났다. 할머니가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무서웠다. 기억으론 할머니는 농약을 먹으려고 했던 적도 있다.
나는 급격히 예민해지고 매사가 불안해졌다.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것도 불안했다. 난처한 상황이나 창피한 상황이 생길까 봐 가슴을 졸였다. 또한 짓궂은 남학생들이 장난을 치진 않을까 노는 무리의 여자애들이 건드리진 않을까 학교 생활 자체도 외줄 타기였다. 전에도 그랬지만 그일 이후 더 심해졌다.
죽고 싶었다. 매일매일 하루에도 오십 번은 죽을 방법을 생각했다. 바닷물에 빠질까, 산에 가서 목을 매달까, 주방 칼로 손목을 그을까. 열다섯, 열여섯의 나는 집에 있으면 그런 생각밖에 안 했다.
훗날 진짜로 우울증 약을 먹기 시작한 나는 그때 병원에 갔어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아마 나 또한 우울증이었을 거라고 과거를 회상하며 줄곧 짐작한다.
그날의 나는 겨우 진정한 할머니 곁에 누워서 두려움에 떤다. 일어날지도 모르는 나쁜 상황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