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가지 않은 지 4년이 넘었다. 당연히 명절에도 안 간다. 고향에서 일할 때도 집에 가는 것보다 일 하는 게 나았다. 명절에 집에 가면 쓸데없는 소리들 투성이고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이 널려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 어느새 명절은 악마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벽처럼 힘껏 내달려 도망치고 싶은 날이 되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그런 내게도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초등학생의 나는 여느 아이들처럼 방과 후엔 구슬치기, 딱지치기, 구름다리 오르기, 비사치기 등등 전래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집엘 갔다. 집에 가선 만화를 봤고 그다음엔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고 일기를 썼다. 어쩌면 초등학생 때야말로 가장 평범했을지 모른다. 어려서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했기에.
그런 일상을 보내다 보면 가장 좋아하는 날이 왔는데 그게 바로 명절이었다. 아빠도 오고 새엄마도 오고 특히, 귀여운 동생들이 오는 설과 추석은 내게 선물 같은 것이었다.
아빠는 나를 고향에 맡겨놓고 곧 재혼을 했다. 성격도 얼굴도 둥글둥글한 꽤 유복한 집의 아담한 여자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첫째가 태어나더니 몇 년 있다 둘째도 낳았다. 순식간에 새엄마와 배다른 동생이 생긴 나는 그 새 가족들의 존재가 얼마나 날 복잡하게 할지 모른 채 그 여자분을 엄마라고 불렀고 여자인 둘째 동생을 유독 어여뻐했다.
"언니, 언니!"
자기 엄말 꼭 빼닮은 귀여운 동생이 언니 하면서 따르면 뭔지 모를 뿌듯함과 안정감이 밀려왔다. 그 아이가 날 좋아했으면 좋겠어서 잘해줬다.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아기나 어린아이들을 좋아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늘 그 3일 남짓한 기간이면, 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빠와 새엄마가 나를 챙겨주는 게 좋았고 동생들이랑 노는 게 너무 좋아서 시간이 안 가길 바랐다. 그러나 그 행복은 돌려줘야 할 선물이었다.
기간제 행복이 끝나면 늘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었다.
헤어짐.
연휴 마지막 날 아침이 되어 아침을 먹고 새엄마가 주섬주섬 짐을 싸기 시작하면 어릴 때의 나는 말이 없어지고 그저 티브이만 보고 있거나 동생들과 조금이라도 더 놀면서 얼굴을 보기 위해 애썼다.
그러다가 했던 것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행동이 가지 말라고 울며 떼쓰는 것이었다.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내가 그땐 달랐나 보다. 한 번은 내 기억에도 남아있을 정도니까.
그날 나는 울며 불며 매달리다가 종국에는 차를 같이 타고 다른 동네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내려서 또 하염없이 울어댔다. 다시 떨어지는 게 너무 두려워서, 못 보는 게 싫어서 울음으로 붙잡았다.
그래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 할머니와 남아야 했다. 함께 갈 수 없었다. 그걸 깨닫고 그들에게 묵묵히 손을 흔들 수 있을 때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명절은 내게 그만큼의 큰 의미였다. 즐겁게 놀 수 있는 날. 외롭지 않은 날. 용돈 받는 날.
적어도 초등학생 때까진 그랬다. 철이 들지 않았던 그때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