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끝나고 삶이 시작될 때

by 티아

타이중으로 워킹홀리데이를 오기 7개월 전 타이베이에서 한 달 살기를 했었다. 그때가 2월로, 한국은 무척 추웠는데 그해 대만은 따뜻해서 해가 좋은 날에는 반팔에 청바지만 입고 외출할 수 있었다.


처음 2주는 타이베이 북쪽의 신베이터우에 머물면서 자주 온천을 갔다. 룽나이탕이라는 대중목욕탕을 애용했는데 입장료가 150원(한화 약 6천 원)밖에 되지 않았고 물도 좋았다. 탕은 두 개, 샤워기는 세 대. 시설은 단출하고 허름했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사랑받는 곳이었다. 아주머니들 사이에서 자주 유쾌한 대화와 웃음소리가 오갔다.


온천을 하지 않는 날에는 베이터우 도서관에 가거나 양명산에 갔다. 밤에는 편의점 어묵꼬치와 고량주를 놓고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봤고, 아침에는 물을 한 잔 가득 마시고 새천년 국민체조를 했다. 한적한 동네 분위기도 그렇고 그때 생활은 마치 요양과 같았다.


신베이터우에서 2주를 보낸 뒤에는 타이베이 스린구의 티엔무(天母)라는 동네로 숙소를 옮겨 또다시 2주를 보냈다. 천무는 외국인이 많이 사는 부자 동네였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백화점부터 보이는 것이 온천수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신베이터우와는 확실히 분위기가 달랐다. 신베이터우보다 물가는 비쌌지만 맛있는 식당은 더 많았다. 특히 충성우육면(忠誠牛肉面麵)의 우육면과 TASTERS의 치즈케이크는 정말 최고였다.


한 달 살기가 끝나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여행은 살아보는 거야’라는 에어비앤비 캐치프레이즈처럼 대만을 살아봤다고 느끼게 될까 기대도 되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뒤 내가 내린 결론은 느리고 긴, 아주 특별한 방식이었지만 여행은 여행이었다는 것이다. 현지인이 빌려주는 집에서 살면서 관광보다는 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살아봤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소속감의 부재가 가장 컸다. 대만에서 나는 가족에도 친구에도 어떤 무리에도 속해 있지 않았다. 얽히고설킨 관계가 하나도 없어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동네 사람 누구도 알지 못할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여행자이고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이런 생활이 엄청난 해방감을 주기는 해도 외로운 것도 사실이다.


영화〈백만엔걸 스즈코〉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어디를 가도 겉돌기만 해서 차라리 아무도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한 적 없어요? 물론 처음에는 아무도 저를 모르지만 점점 아는 사람이 생기고 그러면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죠. 백만 엔만 있으면 집을 빌릴 수도 있고 다음 일자리를 찾을 때까지 생활이 가능하니까요. 그래서 백만 엔을 모아서 전전하고 있어요.”


스즈코의 마음에는 사람에 대한 분노가 있다. 사람과 때문에 좌절했던 경험이 쌓인 분노이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타인은 그저 귀찮은 존재, 얽히면 피곤한 존재, 어차피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존재가 돼버리고 자기 식대로 끌고 가려는 그들에게는 분노를,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자신에게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혼자 여행하는 사람의 마음은 스즈코를 닮았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대만에 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7개월 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들고 다시 대만으로 돌아왔다. 살 집을 구한 뒤에도 아르바이트나 어학당은 알아보지 않고 주로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평온할 것만 같았던 생활이 딱 한 달을 지나자가 뒤숭숭한 기분이 들었다. 스즈코의 말처럼 ‘아는 사람이 생기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몰라주자 내 존재마저 희미해지고 있었다. 가벼운 것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곳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사설 중국어 학원에 등록했다. 그때부터 대만에서의 생활은 여행이 끝나고 삶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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