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에서 살았던 집에는 주방이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원룸에도 라면 하나쯤 끓일 수 있는 작은 주방과 싱크대가 있지만, 외식 문화가 발달한 대만에서는 주방 없는 집이 흔한 편이다. 이른 아침 문을 여는 조식당부터 화려한 야시장까지, 언제 어디에서나 저렴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나라다.
외식이라는 건 여러 가지로 편하다.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이다”라는 문장으로《키친》을 시작한 것이나 위화가《인생》과《허삼관 매혈기》에서 1950년대 중국에서 집집마다 주방이 사라지는 것을 묘사한 부분을 보면, 집에서 밥 짓는 냄새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쓸쓸해질 때도 있다. 이 집에서 살기로 결심했을 때는 주방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없으니 아쉬울 때가 있었다.
아침은 시리얼이나 빵으로 간단하게 해결했고 점심, 저녁은 주로 밖에서 사 먹었다. 그래서 집을 구한 뒤로 동네 맛집을 하나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 동네 맛집 리스트에는 루로우판(돼지고기 덮밥)과 지로우판(닭고기 덮밥)이 맛있는 집, 구운 닭다리가 통째로 올라가는 도시락집, 볶음밥과 딤섬이 가성비가 좋은 집, 군만두와 쏸라탕(시큼 매콤한 국)의 궁합이 좋은 집 등으로 채워졌다.
그중에서도 월남미식(越南美食)이라는 베트남 쌀국수집에 자주 갔는데 이곳 쌀국수는 한 그릇에 80원(한화 약 3,200원)으로 아주 저렴했다. 살짝 핏기가 도는 생소고기와 동남아 바질이 듬뿍 올라가는 쌀국수였다. 원래도 쌀국수를 좋아하는 나지만, 여긴 정말 맛있어서 말 그대로 접시에 코를 박고 먹곤 했다. 가게가 좁아서 붐비는 시간엔 어쩔 수 없이 합석을 해야 했는데, 먹는 데 집중하느라 맞은편 사람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사람은 뭘 시켰는지 슬쩍 보긴 했지만.)
대단한 미식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 생각을 말해보자면 쌀국수에서 중요한 건 육수라고 본다. 감칠맛은 나는데 깊은 맛은 없고, 육수와 고기가 완전히 따로 놀고, 먹고 나오면 온 몸에, 특히 머리카락에 독특한 냄새가 배어서 지하철을 타면 ‘나 오늘 쌀국수 먹었어요’라고 광고하는 듯한 육수는 싫다.
월남미식의 육수는 나주곰탕 비슷하게 깊고 순했다. 심심한 듯도 했지만 바질이 빈 공간을 채워줬고 칠리소스와도 잘 어울렸다. 젓가락에 면과 소고기를 동시에 감아 칠리소스를 살짝 찍어 먹으면 감칠맛이 확 올라가면서 전투력이 폭발하는 기분이 들었다.
쌀국수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엔 예외 없이 달고 시원한 쩐주나이차 생각이 났다. 월남미식은 에어컨이 없는 허름한 식당이었고 내 뱃속은 뜨끈한 국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월남미식 옆에는 마치 한 세트처럼 소차제(小茶齊)라는 흑당버블티 전문점이 있었다. 정말 다섯 걸음 떨어진 위치라서 자유의지를 잃고 이동하기 딱 좋았다.
가게에는 “손에 쥔 작은 행복(握在手中的小幸福)”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쩐주나이차란 정말 그런 음료인 것 같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시원하고 적당히 배도 부른, 그런 작은 행복감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음료.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이면 종종 이곳에서 쩐주나이차를 한 잔 사서 공원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