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아 Apr 12. 2022

남해는 좋은 선택이었어

어제 외주 일을 하나 끝내고 한숨을 돌린 나는 남파랑길 36코스를 걷기로 했다. 전체를 다 돌면 6시간 정도 걸리는 긴 코스인데, 마침 숙소가 그 길 중간에 있어서 날짜를 나눠 반반씩 가면 좋을 것 같았다. 오늘은 왕후박나무가 있는 역방향 길을 선택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차도 갓길을 조심히 지나 남파랑길 코스로 들어갔을 때, 생각했다. ‘남해는 좋은 선택이었어.’ 벚꽃나무 꽃잎이 동화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흙길은 온통 벚꽃 잎이고, 그 위로 나뭇잎 사이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물결처럼 흔들렸다. 야트막한 산세는 이제 막 돋아난 어린잎으로 연두빛을 내고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모습으로 다정히 서 있었다.


어제 대만 친구와 줌으로 언어교환을 하던 중 친구가 왜 남해에 갔느냐고 물었다. 나는 따뜻한 남부 도시로 오고 싶어서 알아보다가 마침 남해에 있는, 좋은 가격의 좋은 숙소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충분한 답이 된다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았고, 친구도 그렇게 느끼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딱히 어떤 이유를 숨기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남해에 온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래서였을까. 남해에 도착하고 며칠은 별 감흥이 없었다. 마감하느라 바빠서 그랬던 것도 있지만, 이보다 더 나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게 더 큰 이유 같다. 어제 마감한 영미소설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한 인물이 하와이에 가려는데 다른 인물이 반대한다. 돈도 많은 애가 발리랄지 더 이국적인 곳을 가지 촌스럽게 웬 하와이냐면서 하와이를 낮춘다. 그래도 그녀는 하와이에 가고, 도착해서는 역시 발리를 갔어야 했나, 후회하다가 결국 생각을 바꾼다. ‘아니야, 하와이는 좋은 선택이었어.’


남해에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울릉도를 가지” 그랬다(내가 요즘 만나는 사람이 엄마밖에 없어서 엄마 이야기가 앞으로도 많이 나올 예정이다). 그리고 남해에 도착한 첫날인가,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휙휙 올려보는데, 퇴사하고 울릉도에 간 누군가의 인스타툰이 나왔다. 역시 울릉도에 갔어야 했나. 속이 썼다. 울릉도 풍경이 그렇게 이국적이라던데. 지금쯤 날씨도 끝내주겠지. 하지만 나는 남해에 와버렸는걸. 그러다 남파랑길에서 내가 이번 휴가에서 원했던 풍경을 보았고, 남해가 좋아졌다.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몰랐는데, 그게 눈앞에 등장해서 퍼즐처럼 딸깍 마음에 맞춰졌다.


2019년 회사에서 귀한 한 달 휴가를 받고 간 곳이 타이베이였다. 그때 한 살 살기 후보 도시로 시카고, 부다페스트, 포르투, 상해, 타이베이, 이렇게 다섯 곳을 생각했다. 시카고는 미국 총기 사건 일 위 도시라서 탈락, 부다페스트는 추워서 탈락(그때가 2월이었다), 포르투는 우기여서 탈락. 마지막까지 상해랑 타이베이를 고민하다가 VPN을 쓰기 귀찮다는 황당한 이유로 상해가 탈락했다(중국에서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를 하려면 아이피를 우회하는 VPN 프로그램을 써야 한다). 과정만 놓고 보면 소거법으로 타이베이가 남은 것 같은데, 어쩐지 나는 처음부터 타이베이에 가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타이베이에서도 처음 며칠은 어리둥절했다. 맛있는 음식이 뭔지도 모르겠고, 언어도 낯설고, 지루하고. 그러다 타이베이가 좋아졌고, 떠나야 할 때는 떠나기 싫어서 ‘비자런(주변국에 한 번 갔다가 돌아오는 식으로 관광비자 3개월을 계속 연장시키는 것)’ 따위를 알아보며 밤을 보냈다.


모처럼의 긴 여행이다 보니 생각이 많아졌나 보다. 비교의 늪에 발을 담갔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빠져나온 기분이다. 어쩌면 반려자를 찾는 것도 이와 비슷하려나. 일 년 연애할 상대를 선택하는 것과 평생 함께할 사람을 선택하는 일의 무게는 다르니까. 그래서 결혼하고 처음 몇 달은 다른 조건의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게 되려나. 그러다 내가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그 사람에게서 퍼즐처럼 발견하면, ‘아니야, 네 짝은 바로 너였어’ 하고 안심하게 되려나. 그러고는 정말 헤어져야 하는 순간에 헤어지기 싫어서 눈물이 나려나.


걷다 보니 풍경이 바뀌었다. 나무들 사이로 파란 바다가 보이다가, 마침내 바다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바다에게 고마운 게 하나 있다. 바로 지구 어디에서나 같은 냄새가 난다는 것. 그래서 눈을 감기만 해도 다른 나라에서 바다에 갔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는 것. 혹은 다른 시절에 갔던 바다를. 이제 다른 곳에서 바다를 봐도 남해가 생각날 것 같다. 2022년 봄의 남해 바다가.


이전 04화 시골에서 받는 흔한 질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