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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아 Apr 12. 2022

집안퉁수의 하루

토스트 두 장으로 아침을 먹고, 필사를 좀 하다가, 김치볶음밥을 하고 남은 해물탕을 데워서 먹고 나니 오후 한 시였다. 어제 갑자기 2만 보를 걸은데다가 내일 엄마가 올 예정이라 오늘은 숙소에서 글 쓰고 책 읽으면서 체력을 비축하기로 했다. 집안퉁수의 하루다. 


처음 ‘집안퉁수’라는 단어를 엄마한테서 들었을 때 너무 웃겼다. 진짜 그런 단어가 있냐고 물으니까 자기 어렸을 때는 그렇게들 말했다고 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까 정말로 쓰이는 단어인데, 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아니었다. 왜 집안퉁수라는 단어가 있는데 ‘집순이’ ‘집돌이’라는 단어가 따로 생겼을까, 하면서 집안퉁수, 집안퉁수 입 안에서 반복해서 말해보는데 어딘가 비꼬는 느낌이 났다. 찾아보니 ‘퉁수’는 목관 악기의 한 종류인 ‘퉁소’의 전라도 방언으로, 퉁소를 밖에서 불라고 하면 못 불고 집안에서만 분다고 하여 집안퉁수라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소심한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확실히 외향적인 성격이 좋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다 《콰이어트》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많은 내향인들이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집안에서 퉁소를 불어도 SNS에 찍어서 올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서 세상을 따라가는 게 의미가 없다. 나는 나대로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세상이 내게 맞춰지는 날을 기다리는 편이 낫다. 


그저께 포장해온 해물탕 소자를 삼일에 걸쳐 다 먹었다. 조개껍데기, 전복 껍데기, 새우 껍데기 등 해물탕을 먹고 나온 쓰레기를 비닐봉투에 묶어서 밖에 내다놓았는데, 빨래를 널러 다시 나가 보니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봉투를 찢어서 새우 머리를 뜯어 먹고 있었다. 지금까지 테라스에서 많은 고양이를 봤지만 처음 보는 고양이었다. 고양이는 후다닥 도망치면서도 아주 멀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눈이 마주쳤는데, 엄청 무서운 눈빛이었다. 화가 난 닌자 같았다. 품에 수리검이 있었다면 이미 내 가슴에 꽂혔을 것 같다. 나는 방에서 큰 봉투를 들고 나와 주위에 떨어진 쓰레기와 찢어진 쓰레기봉투를 주섬주섬 담았다. 그리고 뚜껑 달린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넣었다.


혹시 고양이가 플라스틱 쓰레기통까지 뒤졌을까 싶어서 저녁 8시쯤 또 한 번 나가보니 쓰레기는 사장님이 깨끗이 치워가고 없었다. 문득 바깥의 나무 냄새가 무척 좋게 느껴졌다. 위스키 뚜껑을 열었을 때 나는 오크향 만큼이나 진했다. 방에서도 창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방안에서는 그 정도로 진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들고 나왔다. 이번 남해 여행에 가져온 책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의자에 앉아 무심코 고개를 올려보니 하늘에 반달이 떠 있다. 불이 켜진 전등이 따뜻한지 그 옆에 고양이가 한 마리 있다. 저 애는 전에 본 적이 있는, 등과 머리는 까만데 배와 발은 하얀 녀석이다. 동네에 고양이가 너무 많아서 누가 누군지 헷갈린다. 쟤한테는 일단 ‘반달’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반달 아래 반달이와 나무 냄새 맡으며 책을 읽고 있자니, 온몸의 세포들이 소리를 지른다.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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