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21에서 주최하는 와인 시음회에서 일을 하게 되어 장장 5년 만에 그랜드 하얏트에 가게 되었다. 5년 전, 안산에서 살 때엔 위치가 영 애매해서 가는 길이 꽤나 험난했는데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선 도어 투 도어로 30분이란 시간이 채 걸리지 않게 도착을 해서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다.
사실상 차도에 가까운 횡단보도를 건너고 건너 도착한 호텔 안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마치 이곳만큼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것처럼 느린 음악이 흐르고, 음악에 맞춰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곤 하였다.
나 홀로 다른 별에서 온 것처럼 헐레벌떡 가던 걸음을 서두를 뿐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서울이란 도시 전체가 쏟아질 듯 눈앞에 펼쳐졌다. 여의도 빌딩에서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풍경이었다. 와-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각 층엔 투숙객들의 휴식을 위해 편안한 소파가 곳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 많은 호캉스를 갔어도 소파를 이용한 적은 체크인이나 체크아웃이 길어질 때 잠시 앉았던 용도뿐이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아무런 생각 없이 소파에 앉아있는 게 왠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오늘 하는 일에 대한 짤막한 안내를 받고, 좀 기다리다 점심을 먹기엔 조금 이른 시간에 지하에 있는 구내식당으로 가게 되었다. 구두 바닥이 딱딱해서 벌써부터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와 별개로 호텔 지하는 처음 가보게 되었는데 여간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바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지속적으로 세탁되어 나오는 수건들을 여러 직원들이 손수 다리고 개고 있는 장면 때문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찰리의 초콜릿 공장 속에 내가 직접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다. 길고 긴 복도 한편엔 두툼한 수건 수십 개가 렉 위에 쌓여 있었다. 이 많은 수건들이 각각 안전히 객실에 도착하는 모습이 연상이 되는가.
오늘 메뉴는 열무말이 냉국수였다. 식판을 들고, 자기가 먹고 싶은 반찬을 하나씩 담아 먹으면 됐다. 마침 마카로니 샐러드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아침에 얼핏 스쳐 지나가듯 했는데, 반찬 코너에 떡하니 마카로니 샐러드가 있어 오늘은 운이 정말 좋다는 생각을 했다. 5성급 호텔답게 맛과 균형 모든 게 들어맞는 식사였다.
인원의 대부분은 시음장에서 와인을 따르는 일에 투입이 되었고, 나와 한 명은 입장객 확인 및 명찰을 나눠주는 리셉션 일을 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간 때엔, 1부 교육이 막 끝난 터라 회장을 잠시 구경할 수 있었는데 통유리 안에 롯데타워를 비롯한 서울 시내가 햇빛 속에 반짝이고 있었다. 꼭 카메라 프레임 속 풍경 같았다. 전망 좋은 곳에 별 감흥이 없던 나도 날씨가 워낙 좋아서 그런지,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었다.
장 앞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생면부지의 투숙객들을 곁눈질로 흘겨보면서 이런 곳에서 연박을 하면 과연 어떤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나 흥미로운 칼럼이 나올 것 같았다. 최근 <킹더랜드>라는 호텔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방영을 했었다. 한국 드라마엔 재벌 2세나 본부장, 대표와 같은 직함을 가진 이들이 심심찮게 등장을 한다. 그걸 보면서 단연코 그들의 삶에 공감한다거나 그런 로맨스를 꿈꿨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초에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무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평소에 그런 사람들을 대면하거나 겪어본 일이 없기 때문인지 내게 그런 드라마들은 ㅡ특히, 그런 명망 있는 사람들이 평범한 서민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ㅡ 판타지 장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는 생각을 줄곧 했었다.
그러나 사실 돈을 많기 벌기 위해서는 그런 사람들을 자주 보거나, 만나거나, 아니면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들어가 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직접 보고, 듣고, 겪어봐야지만이 일종의 감感이란 게 생기기 때문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이 괜히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은 나에게 무언가의 영감을 주기 충분했다. (와인 행사에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와인 도소매상, 레스토랑 또는 와인샵 대표/직원, 리테일 종사자, 넓게는 인플루언서에 불과했지만.) 그곳에서 일을 하는, 초청을 받는, 연박을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나의 세계가 조금은 넓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을 한 것만으로 이렇게 긴 글을 쓰게 되었으니 이게 남는 장사가 아님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