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캠핑은 노지 캠핑이었다. 노지 캠핑이란, 전기가 들지 않는 정박지에서 하는 캠핑을 말한다. 전기가 없으면 고기를 구울 때, 불을 켤 때, 에어컨이나 난로를 돌릴 때 등등 사소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들에 제약이 걸린다. 어둑한 저녁에 불을 켜고 밥이라도 지어먹으려면 전기가 아닌 다른 동력을 사용하는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나는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인의 장비를 대여해서 떠난 여행이었는데, 대여한 캠핑 장비의 기능을 숙지하지도 않았다. 정박지는 패기 넘치게 통영의 한 섬으로 정했다. 바다가 예쁘다는 이유였다. 첫 캠핑을 오토가 아닌 노지에서, 그것도 섬에 들어가서 하려고 하다니. 무식한 자는 용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에 와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황금연휴에 너도나도 고속도로로 나선 차 때문에 뱃시간을 놓쳐서 섬에 들어가지 못했다. 급하게 핸드폰으로 검색을 해서 목적지를 남해의 노지 캠핑장으로 선회했다.
우여곡절 끝에 남해에 도착했다. 새벽같이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사위가 어둑했다. 빌려온 텐트여서 피칭부터가 난관이었다. 설치법이 적힌 종이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부모님 따라 캠핑을 몇 번 다녀보았다는 지인의 리드 하에 움직였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텐트를 치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구나 했지만, 곧 맑은 하늘이 조금씩 흐려지더니 부슬비가 내렸다. 해는 점점 어두워지는데 챙겨 온 전등이 전기를 사용하는 제품이라 켤 수가 없었다. 근처 낚시용품점에서 건전지를 넣어 켜는 전등을 급하게 사 왔다. 생각보다 빛이 희미했다. 어두워질수록 마음은 조급해졌다.
한참을 헤매다가 고수의 향기가 물씬 나는 옆자리 캠퍼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고 보니 폴대를 엉뚱한 곳에 끼우고 있었던 게 문제였다. 문제의 원인을 찾고 나니 피칭과 짐 정리는 일사천리로 끝났지만 이미 지친 후였다. 짐 정리까지 두 시간 반은 걸렸다. 저녁이고 뭐고, 지쳐서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아이스박스에 얼음과 함께 넣어두었던 맥주부터 한 캔씩 깠다.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보다 훨씬 차가웠다. 딸칵, 캔을 카고 목을 뒤로 젖혀 맥주를 꿀떡꿀떡 넘겼다.
세상에, 기가 막히게 시원했다. 너무 시원하고 달고 맛있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캠핑한다고 오늘 개고생 했네. 근데 왜 이렇게 맥주는 시원하고 맛있는 거야.' 그제야 눈 앞에 아름다운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해수욕장 바로 앞에 자리 잡아, 남해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해변에서 마주 보이는 돌섬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어서, 파도가 거세지 않고 잔잔했다. 의자에 앉아있으니 파도가 규칙적으로 찰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죽인 채 파도 소리를 한참 들었다.
그러고 나서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내 사전에 몸이 고되다고 끼니를 굶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꼬르륵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하기에는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아까 구입한 작은 전등과 핸드폰 플래시에 의존해서 요리를 했다. 메뉴는 무난하게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했다. 삼겹살에 허브솔트를 톡톡 뿌려 팬에 굽고, 식감이 좋도록 두껍게 썰었다. 편의점에서 햇반을 사 오고, 숭덩숭덩 썰은 돼지고기를 잔뜩 넣은 김치찌개도 끓였다. (김치찌개는 먹다가 바람이 불어 냄비 째로 엎었다.) 집에서 요리를 하는 것과 달리 장비가 손에 익지도 않고, 동선도 불편해서 별거 아닌 요리인데도 애를 먹었다. 고생 끝에 차려진 한 상을 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밤바다 앞에 멋진 한 상을 떡하니 차려서 먹다니, 벌써부터 능숙한 캠퍼가 된 기분이었다.
그날 먹은 삼겹살은 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삼겹살이었다. 쌈채소 위에 두툼한 고기를 하나 얹고, 명이나물과 수제피클을 넣어 입안 가득 욱여넣었다. 씹자마자 고기의 육즙과 피클의 상큼한 맛이 동시에 퍼졌다. 여태 먹은 삼겹살이 일반계의 요리였다면, 그날 먹은 삼겹살은 천상계의 요리라고나 할까. 그건 그냥 음식이 아니었다. 황금연휴에 집 나와서 고생 한 스스로에게 주는 보상이었고, 시장을 반찬으로 한 메인 요리이자, 첫 캠핑요리이기도 했다. 얼떨떨한 하루였다. 고생해서 여행을 왔는데, 바다는 아름답고, 맥주는 미치게 시원하고, 삼겹살은 먹어본 것 중 제일이고, 소주는 말할 것도 없이 달달했다.
잠자리를 가릴까 했던 걱정이 무색하게, 그날 밤은 꿀잠을 잤다. 새벽에 살짝 깼을 땐, 규칙적인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르 몰려왔다가, 철썩. 그리고 스르륵 물이 빠지는 소리.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은 날 동안, 바닷물을 찰박이며 산책을 하고, 바다 앞에 돗자리를 하나 깔아놓고 누워서 실컷 바다를 구경했다. 더울 때는 텐트로 돌아와서 맥주를 마시고 낮잠을 늘어지게 잤다. 일어나 있을 땐 보드게임을 하고, 소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억지로 애써서 해야 하는 일 없이,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고 치우기만 하면 됐다.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 이후 나는 ‘남해 앓이’를 하게 됐다. 툭하면, 남해로 떠나고 싶었다. 인생 첫 캠핑이자, 첫 남해여행은 인생 최고의 여행으로 등극했다. 명예의 전당에서는 남해 여행이 끊임없이 상영되었다. 일상이 지루해질 때 남해 여행 사진을 다시 꺼내보았다. 조용하고 아름다운 시간들. 따뜻하게 내려앉던 햇살과 눈 부시게 반짝이던 바다가 생각이 났다. 그곳을 다시 찾으면 어떨까 여러 번 덧그려보았다. 3개월 간격으로 남해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다가, 여름을 맞아 두 번째 남해여행을 하기로 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좋았던 곳에 다시 가서 추억을 퇴색시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됐다. 시간이 흘러 남해여행을 미화시키고 있던 건 아닌지, 이번에 가서 그 사실을 깨달아버리면 얼마나 상심이 클지를 생각했다. 그래, 사서 걱정이다. 하지만 나는 진지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학창 시절에 어떤 선배를 남몰래 짝사랑했는데, 시간이 오래 지나고 동창회에 갔더니 그 선배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늙어버린 것이다. 충격적인 건 두 말할 것도 없고 이유모를 배신감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해에 가서 첫사랑의 추억을 빼앗긴 것 같은 신세가 되어버리면 어찌하나 걱정됐다.
반쯤은 설레고, 반쯤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남해로 향했다. 남해에 도착하자, 그간의 걱정이 불필요했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다시 찾은 남해는 여전했다. 바다를 감싸고 있는 금산과 레이스 커튼처럼 잔잔하고 바다까지. 바쁜 서울의 일상에서, 한적하고 평화로운 남해로 순식간에 빠져들어갔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아예 장르가 다른 영화로 뛰어든 기분이었다. 예를 들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인턴' 같은 영화를 보다가, '리틀 포레스트' 속으로 장면을 전환한 느낌이었다. 복작복작 시달리던 나에게 찾아온 평화로움에 처음과 같은 얼떨떨함을 느꼈다. 평일이라 그런가 캠핑객은 우리뿐이었다. 빼곡한 송림 사이, 바다가 잘 보이는 명당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우리를 반겨주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바로 고양이었다. 여행객이 던져주는 음식을 먹으며 사는 건지 겁도 없이 우리 근처를 계속 맴돌았다. 그게 귀여워서 참치를 헹궈주었다. 텐트를 치는 동안 고양이 서넛 마리가 모여서 우리를 구경했다. 분명 이런 대화를 하고 있었을 거다. '저 인간들 뭐 하고 있는 거냐?' '몰라, 구경하다가 참치나 받아가자.' 나뭇가지에 솔방울을 달아 흔드는 등 고양이의 관심을 끌겠다고 쇼를 하다가 텐트 설치에 2시간이 넘게 걸리고 말았다.
길고양이와는 끝끝내 친해지지 못했다. 길고양이가 사람과 가까워지면 위험할 테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우리에 대한 경계를 조금이나마 풀었던 거 같다. 새끼 고양이 두 마리가 텐트에 들어와 실컷 자고 나가기도 했고, 고양이 서넛 마리는 낮잠을 자는 우리 옆에 자리를 잡고 같이 잠을 청하기도 했다. (비록 언제든 튀어나가려고 식빵을 굽고 있긴 했지만.)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바다 앞을 느긋하게 산책하는 고양이를 만났다.
완벽한 행복이었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행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 순간에는 그렇게 느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누워 낮잠을 자는 팔자 좋은 고양이 같은 삶이었다. 낮에는 바다를 보다가 햇빛을 받으며 잠을 자고, 하루 종일 할 일 없이 늘어져 있어도 괜찮았다. 밤에는 캠핑 의자를 바다 가까이 끌어다 놓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마셨다.
늦은 시간이 되니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바다를 전세 낸 듯했다. 의자에 푹 파묻힌 채 고개를 들어보면, 밤하늘에 별이 반짝였다. 대강 세어봐도 열두 개쯤 됐다. 눈을 감으면 큰 파도가 나에게 덮쳐 오는 것처럼 파도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파도가 흩어지며 잠시 고요해지는 순간에는 온 세상이 정적 속에 잠기는 것만 같았다.
그때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면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걸. 이 기억은 결코 미화된 게 아니며, 퇴색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남해 여행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별이 되어줄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어쩐지 눈물이 났다.
캠핑은 여행보다는 일상의 닮은꼴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호흡의 일상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양한 자극을 접하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분투하는 서울에서의 일상도 싫지 않지만, 캠핑장에서의 느린 일상은 못지않게 매력적이었다. 잠시 생각은 내려놓고, 거대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내게 특정한 역할을 기대하는 사회, 주변 상황에서 벗어나서 그저 나로 기능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나는 자주 잊고 만다. 그러니 그 사실을 또 잊을 때쯤 다시 남해를 방문할 생각이다. 여전히 명예의 전당에서는 남해 여행이 재상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