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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Apr 29. 2020

봄이 가기 전에 해야 할 일


 20년 봄,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인해 비상이 걸렸다. 정부는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실천을 권고했고, 그 기간은 나날이 연장되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바이러스가 주춤하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은 하루빨리 이 사태가 종식되길 비는 염원으로 변했다. 한 해의 축이 되어 주던 많은 목표를 잃었고, 더 나아가 생계를 위협당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럼에도 꽃은 피고,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다. 코로나 때문에 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리란 생각은 기우였던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봄이 애틋하고 고마우니 말이다. '한강에서 꽃놀이하기', '꽃 축제 가기'는 못해도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풍경까지 박탈하지는 못했다. 


재택근무 중,  점심시간을 틈타 집 근처 공원에 가곤 했다. 텀블러에 아이스 라테를 담고, 이북리더기와 이어폰을 챙겨서 햇볕이 잘 드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을 읽었다. 공원 여기저기 벚꽃과 개나리, 그리고 이름 모를 수많은 꽃이 피어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도, 강아지의 타닥타닥하는 발소리도 잘 고른 음악 소리처럼 기꺼웠다. 햇볕을 받아 녹음은 더 푸르게, 꽃은 더 화려하게 반짝였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겨우내 추위가 가시고 따뜻한 봄기운이 밀려오면 기어코 마음 한 구석이 말랑해진다. 일상적인 풍경마저 한껏 멋을 내고 색동옷을 꺼내 입은 풍경 앞에서 생경하게 느껴진다. 봄은 모든 나날이 여행과 닮아있다. 역동하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시기. 밖을 한참 걸어 다녀도 땀이 나지 않고, 가끔 부는 바람이 선선한 때. 그 순간은 찰나와도 같기 때문에, 봄이 왔다는 걸 느끼면 최대한 부지런해지려 한다. 좋아하는 계절을 오래 음미하고 누리기 위해서다. 겨울은 뭐, 좀 허투루 보내도 된다. 일단 춥지 않은가.





희한하게도 집안의 안 좋은 소식은 늘 봄에 전해졌다. 15년도 봄이었다.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을 때, 전화로 가족 구성원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가족 중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었기에 절망, 비관, 분노, 슬픔 등 무어라 한 가지로 축약하기 힘든 마음이 한 번에 밀려왔다. 도서관에 멍하니 앉아있다가 짐을 주섬주섬 싸서 기숙사로 돌아갔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각자의 사정으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때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고, 툭 치면 눈물이나 하소연을 쏟아내기 직전이었던 나는 별로 가깝지도 않은 그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자신이 겪은 몇몇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느낀 건, 힘든 일을 겪을수록 더 의연해져야 한다는 거야. 큰일이 닥칠수록 주변에 힘든 티 같은 거 내지 말고, 괜히 우울해 있지도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지금처럼 혼자 울고, 다른 사람한테 우는 소리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이런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 더 쓸모 있는 일을 해." 


공감과 위로는커녕, 훈계조로 설계를 늘어놓은 말인데도 몹시 위로가 되었다. 당장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였기에 ‘정신 차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그의 조언이 도움이 됐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샤워를 하고 일찍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평소처럼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렀다. 


시험을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우울해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으니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지 않도록, 또 다른 가족들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도록 의연하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미 일은 일어났고, 슬퍼한다고 그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으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통제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좋은 날은 짧다. 인생에서 좋은 부분은 대부분 짧고, 좋지 않은 부분은 억지로 늘린 필름만큼 지지부진하게 길다. 그러니 좋은 순간이 오면 최대한 열심히 그 순간을 즐기는 수밖에, 좋은 점을 최대한 많이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위안이 되는 점은 그래도 어김없이 봄은 돌아온다는 점이다.


또다시 맞이한 봄이, 불행 속에서 핀 꽃이, 어김없이 들뜨고 설레는 마음이 기껍지 않을 리 없다. 그 어느 때보다 평범한 일상에 감사해지는 요즘이다. 나의 건강도, 따뜻한 봄도, 내가 누리는 것 중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누릴 수 있는 것이 이토록 많이 남아있음에 감사하는 봄날이다. 역시 안 되겠다. 오늘도 봄 산책을 떠나야지.





<봄이 가기 전 해야 할 일>

1. 한낮에 집 근처 공원에서 책 읽기
2. 동네의 벚꽃 명소 찾아보기
3. 봄볕에 30분 이상 광합성하기
4. 밤 벚꽃 구경하기
5. 카페 야외석에서 아이스커피 마시기
6. 테라스 자리에서 식사하기
7. 봄과 어울리는 꽃을 사서 집안을 장식해두기
8. 백예린 <지켜줄게> 듣기
9. 가방 없이 출근하기
10. 좋아하는 재킷 꺼내 입기
11. 평소에 가보지 않은 길로 걷기
12. 낮부터 맥주 마시기
13. 여행 계획 세우기
14. 예쁜 풍경을 찍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내기
15. 올봄을 보내며 가장 좋았던 일 3가지 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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