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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로 Sep 24. 2020

주거지 선정의 우선순위


이사는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다. 더 정확히는, 포기의 연속이다.


고시텔, 반지하 원룸을 거치고 나니 내 머리를 사로잡는 문장이 하나 있었다. '다음 집은 무조건 지상층으로, 넓은 곳으로 가자.' 반지하가 아니고, 6평보다 넓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눈을 너무 낮췄던걸까? 그렇게 고른 집은 정말 넓은 것 말고는 딱히 장점이 없었다.


일단, 해가 너무 안 들었다. 겨울에 수도가 동파되어 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창문 몰딩이 나무로 되어 있어 곰팡이가 슬고 웃풍이 그대로 드는 것도 참을만했다. 하지만 일조량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었다. 바로 앞에 있는 주택이 해를 온통 가려서 빛이 거의 들지 않았다. 하루종일 깜깜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다짐했다. '다음 집은 무조건 해가 잘 드는 곳으로 가자.'


퇴거를 3개월 앞두고, 회사 근처로 집을 보러 다니기 시작했다. 짐작한 대로 서울 집값은 더럽게 비쌌다. 그나마 집값이 저렴하다던 관악구 쪽 원룸도 전세로 1억 5,000만 원이 가뿐히 넘었다. 내가 보유한 금액, 대출 가능한 금액을 부동산에 얘기하면 하나같이 이런 말을 했다. "그 돈으론 여기서 전세 못 구해요." 해가 잘 드는 1층 이상, 10평 이상의 집을 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그 조건엔 매물 없어요."라는 중개사들의 말에 몇 번이나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어떤 부동산은 내 조건으로는 재개발 구역에 있는 집이 아니면 살기 어렵다고 했다. 마침 재개발 구역에 좋은 매물이 있다고 하여, 중개사와 집을 보러 갔다. 그 집은 원래 살던 곳만큼이나 오래되고 낡은 곳이었다. 벽 한 면이 주황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고, 심지어는 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 곳이었다. 지난 집처럼 넓은 것 말고는 별다른 장점이 없었다.(구옥은 대부분 넓다.)


중개인은 내가 가진 돈으로 이 이상 좋은 집은 절대 구할 수가 없으며, 이 집은 너무 조건이 좋기 때문에 언제 계약이 될지 모른다고 바람을 잡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전전긍긍하며 급하게 대출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기시감이 들었다. '너무 급하게 계약하는 거 같은데...? 지난번에도 이렇게 계약했다가 후회했던 거 같은데?' 성급하게 계약했다가 땅을 치고 후회하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재개발 구역이라는 점도 찝찝했다. 결국 그 집은 계약하지 않기로 했다. 


이후에도 여러 부동산을 전전하다가, 지금 사는 집을 소개해준 부동산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이번 부동산과는 합이 너무 좋았다. 중개인 분은 젊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집 취향을 잘 파악하고 있었고 좋은 매물도 많이 가지고 계셨다. 그분이 보여주는 집은 다 마음에 들었다. 여러 가지 최악 중에 차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최선의 집을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계약한 집은 아주 넓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좁지도 않다. 지은 지 5년이 안 된 깨끗한 건물이고, 무엇보다도 남동향이라 오전에도 오후에도 햇빛이 잘 든다. 창가에 서면 저 멀리 산도 보인다. 식물을 키울 수 있는 난간도 있고, 한편에 작은 테라스도 있다. 보자마자 알았다. 이곳에 살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란 사실을. 그렇게 이 집과 인연을 맺었다.




여러 번에 이사 끝에, 공간을 선택할 때 가장 먼저 따져봐야 하는 우선순위가 생겼다. 일단 직주근접은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한다. 직장과 멀어지면 이동에 버리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대신 회사와 너무 가까우면 집값이 비싼 데다가, 퇴근하는 기분을 만끽하기 힘들기 때문에 회사에서 편도 30분이 걸리는 동네를 후보군으로 두었다.


그외에 부동산을 보는 1순위 조건은 '채광'이다. 첫 자취를 고시텔에서 하고, 그다음을 반지하에서 보내서 그런가. 나는 일조량에 몹시 민감하다. 해가 안 들면 곰팡이가 잘 핀다. 보통 채광이 좋지 못하면 덤으로 통기성도 나쁘기 때문에 공기가 습하고,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과탄산소다나 식초를 넣고 빨래를 해도 쿰쿰한 냄새가 난다. 이불 빨래는 꿈도 못 꾼다. 코인빨래방에 가서 건조기에 빨래를 여러 번 돌려 바짝 말려와야 한다. 무엇보다 집이 밝지 않으면 답답한 기분이 든다.


2순위는 '연식'이다. 바로 직전에 살았던 집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집이었는데, 웃풍이 심하고 습해서 방 전체에 얼룩덜룩한 곰팡이가 슬었다. 집주인에게 말했더니 단열벽지를 도배해주긴 했으나, 딱 곰팡이가 난 부분에만 벽지를 재단해서 붙였기 때문에 같은 방인데도 벽지가 다른 우스운 모습이 되었다.


게다가 집안 구석구석에 여러 세입자가 거쳐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싱크대 상하부장은 촌스러운 옥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여러 배달업체에서 받은 메뉴판 스티커도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런 식의 사용감은 문짝을 뜯어내고 새로 달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리모델링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


3순위는 '치안'이다. 여자들이라면 십분 공감할 텐데, 집 근처에 유흥업소가 있거나 술집이 많은 곳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말해봤자 입 아픈 얘기지만 치안이 좋지 않아서다. 같은 이유로 옥탑도 후보군에 두지 않는다. 빌라 건물이라면, 엘리베이터는 없어도 괜찮지만 CCTV 유무는 꼭 확인한다. 집에서 역까지(혹은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길이 후미진 골목은 아닌지도 꼭 살펴야 한다.


일례로, 신림에 살았을 때 역까지 가는 길에 굴다리가 있었는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남자 노숙자가 나에게 달려들 기세로 소리를 치고 욕을 퍼부었다. 웃긴 건 꼭 여자에게만 그렇게 고함을 질렀다. 민원을 넣어보았지만,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역까지 멀리 빙 둘러 가야 했다. 월셋집이라 1년만 살아서 망정이지, 오래도록 고통스러울 뻔했다.


지금 사는 집은 세 가지 조건을 다 만족한다. 대신, 언덕배기에 있어 오르기가 힘들고, 역과 가깝지 않다. 근처에 식당이나 카페도 없다. 그런 건 포기가 가능한 영역이다. 집 가는 길이 오르막이고, 집과 역이 먼 것은 걷기 운동에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근처에 식당이나 카페가 없는 것도 상관없다. 원래도 집 근처 식당이나 카페에 자주 가지 않는 편인 데다가, 요즘은 배달도 워낙 잘 되어 있으니.


또 한 가지 포기한 것은 거실 공간이다. 원래 거실로 사용하는 공간이 있긴 한데, 식탁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거실에 식탁을 두기로 했다. 어차피 TV도 없고, TV 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침대에 누워서 아이패드로 보는 걸 좋아한다. TV와 거실은 포기가 가능하지만, 식탁만큼은 없어서는 안 된다. 예전부터 앉은뱅이 상을 펴고 밥을 먹거나, 작은 아일랜드 식탁에서 밥을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좁거나 낮은 곳에서 식사를 하면 생활이 옹색해지는 기분이다. 혼자 먹어도 넓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게 좋다.


처음 독립할 때부터 30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할 형편이 되는 게 아니라면, 주거지 선택 과정에선 필연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긴다. 그러니 나에게 우선되는 가치를 알면 선택이 수월해진다. 자취방도 체험판처럼 한두 달 살아보고 결정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그런 방법은 없어서 결국 여러 집을 거치고서야 우선순위가 바로 섰다. 결국은 살아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주거지의 취향도 그중 하나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자취방 구하는 꿀팁'으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니, 별 수 없이 직접 살아보고 체득하는 수밖에.


사실 나는 대부분의 일을 그렇게 익힌다. 조립식 물건이 오면 설명서를 대충 보고 내 식대로 무작정 조립해본다. 간단한 건 괜찮지만 복잡한 건 처음부터 다시 조립해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익히는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 한 번 벽에 부딪혀봐야 처음부터 차근차근 익힐 의욕이 난다. 이사도 마찬가지다. 집을 옮길 때마다 뚜렷해지는 취향이 기껍다. 앞으로 무조건 집이 넓어지고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믿지는 않는다. 인생이 레벨업이 아니듯 내 집이 항상 레벨 업될 순 없겠지.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 공간의 취향이 생긴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3번의 이사를 거치며, 내가 살던 공간과 물리적으로 이별했지만 그 공간에 살던 기억만큼은 남았다. 고시텔에서 처음으로 내 공간을 가져보았고, 원룸에서 취향과 취미를 발아시켰고, 구옥 빌라에서 살림의 감각을 익혔다. 이 집과 함께 또 어떤 변화를 맞이하게 될까? 온통 장점밖에 보이지 않는 이 집도, 언젠가 콩깍지가 벗겨지듯 나쁜 면이 눈에 들어올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다만, 내 인생이 나만의 공간을 가꾸고 지키기 위한 여정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아래 링크를 통해 <내 방을 찾아서>를 함께 읽으시면 더 좋습니다.

https://brunch.co.kr/@ser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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