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을 하고 가장 후회하는 5가지 중 마지막에 대한 이야기다.
(전)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아쉽고 후회스러운 부분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결혼 자체를 부정하고 싶진 않다. 노력 여하에 따라 충분히 잘 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부부싸움이라 할 만큼 크게 싸웠던 날, 그날로 돌아가 그 첫 단추를 잘 꿸 수 있다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 'Contaminated Relationship'라는 개념이 있다. 명확한 한국 용어가 없지만 '오염된 관계'라고 번역할 수 있겠다. 인간관계에서 부정적인 감정이나 왜곡된 인식으로 인해 관계의 질이 훼손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관계에서 지속적인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며, 한번 오염된 관계는 되돌리기 매우 힘들고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오염된 관계의 가장 흔한 예가 가족과의 관계라고 볼 수 있다. 평소 지인이나 친구에게 짜증 한번 내보지 않은 사람도 엄마한테는 별거 아닌 일에 쉽게 짜증을 내곤 한다. 나 또한 '엄마에게 짜증 내지 않기'가 끝나지 않는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미 엄마의 행동으로 인해 버럭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 적이 있기 때문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똑같이 행동하게 된다. 엄마도 같이 화를 내지만 짜증을 낸 것에 대해 회초리를 들거나 하지 않기 때문에 암묵적으로 그러한 행동 패턴이 형성 돼버리는 거다.
특히 배우자를 포함해 가족이라는 존재는 가장 안전한 사람이자 가까운 관계이고, 그럴수록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쉽다. '아무리 화내도 떠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믿음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덜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부부관계가 한 번 오염되면 특정한 대화 패턴이나 행동 패턴이 반복되기 쉽고,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대화 방식은 교정도 힘들뿐더러 관계에 계속해서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 길게 보면 서로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건강한 상호작용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내가 처음 부부싸움을 한 날을 후회하는 이유는 처음 보는 남편의 과격한 언행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제대로 된 대응이란 걸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따져 물으며 다음부턴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 말고는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연애할 때 그런 말을 들었다면 헤어짐을 생각했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는데도 '너무 화나서 이번만 실수한 거겠지, 다음부턴 안 그러겠지' 생각하며 넘겼다.
하지만 이후로도 과격한 언행은 술을 마시거나 화가 났을 때 종종 튀어나왔고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우리 관계는 오염되기 시작한 거다. 화난다고 아무 말이나 내뱉어도 결국엔 내가 용서를 해주니 폭언을 하고, 화가 풀리면 사과하고, 그럼 나는 다신 안 그러겠단 약속을 받고 또 용서하는 패턴이 만들어졌다. 이 패턴은 우리가 이혼하는 순간까지 반복됐고, 한번 오염된 관계를 되돌리는 건 부부상담을 받으며 노력해도 힘들 만큼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처음 부부싸움을 하고 남편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은 그날로 돌아간다면, 나는 그 즉시 짐을 싸서 친정으로 들어갔을 거다.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난 이런 사람이랑은 못 산다고, 결혼을 다시 생각해 보자 하고 집으로 가버렸을 거다. 실제 마음속으론 기회를 주고 싶고, 아직은 이혼할 생각이 없더라도 그렇게 행동을 해야 남편이 다시는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령 어느 날 엄마에게 짜증을 냈는데 엄마가 뒷목을 잡고 쓰러지셔서 한 달을 못 깨어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다음엔 절대로 엄마에게 짜증을 내지 못할 거다. 첫 부부싸움에, 혹은 처음 폭언을 하거나 약하더라도 폭력성 있는 행동을 보인다면 그 순간에 바로잡아야 한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사람은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 사람이구나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물론 나 또한 상대방을 소중히 대하는 건 기본이다.
우린 동갑이었기 때문에 싸울 때 조금 더 편하고 쉽게 막말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래서 동갑이거나 말을 편하게 해온 사이일수록 평소 존댓말을 쓰거나, 싸울 때만이라도 존댓말을 쓰는 규칙을 만들어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심한 말을 내뱉는 순간 관계는 점점 더 쉽게 오염되기 시작한다.
애초에 오염을 막는 것이 되돌리는 것보다 훨씬 쉽다. 오염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노력보다 수백, 수천 배의 노력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결혼 초에는 다툴 일이 있을 때마다 바짝 긴장하고 좋은 관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기억하자. 처음이 중요하다. 내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배우자가 했을 때, 뒷목을 잡고 쓰러지든, 즉시 가방을 싸서 친정으로 가버리든, 충격으로 정신이 이상해진 거처럼 풀린 동공으로 앞으로 구르기를 하든 배우자에게 다신 그러지 못할 만한 충격을 줘야 한다.
잘 싸우는 부부가 오래간다고 했다. 오염을 막기 위한 노력은 잘 싸우기 위한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지속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기술임에 틀림없다. 그러니 부디 부부싸움을 할 때 좋은 관계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현명하게, 잘 싸우시길 진심으로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