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화하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편이라 스스로 대화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친구의 연애상담, 고민상담도 잘해주고 만족도도 높아서 나의 의사소통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결혼 후 (전)남편과 대화가 안 돼 답답해보기 전까진 그랬다.
감정이 상했는가 안 상했는가, 의견이 같은가 다른가, 대화 주제가 무겁냐 가볍냐, 어떤 사이인가 등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대화를 하는가에 따라 대화의 난이도는 천차만별이다. 우리가 평소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대화중에서도 난이도 최하위라고 보면 된다. 친구는 나와 비슷한 성향, 비슷한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라 의견충돌이 생길일도 적고, 생긴다 해도 오늘 점심 메뉴가 떡볶이냐 파스타냐 혹은 여름휴가를 부산으로 가냐 양양으로 가냐 정도의 사소한 문제 일거다.
하지만 결혼생활을 하다 보면 가지각색의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고,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부부가 나누는 대화의 난이도는 최하위부터 최상위까지 다양해진다. 가장 가깝고 편한 사이인 데다 매일 보기 때문에 부딪힐 일들도 많고, 반드시 의견을 하나로 일치시켜야 하는 상황도 흔하기 때문에 결혼 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난이도의 대화를 자주 나누게 될 수밖에 없다.
남편과 나는 성격도 가치관도 다르고, 화를 내는 방식, 푸는 방식 모든 것이 참 달랐다. 달라서 좋은 부분도 있으나 이러한 간극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 쉬운 것 또한 사실이다. 일상대화를 하다가도 말 한마디에 대한 생각차이가 금세 오해로 번졌고 갑자기 대화의 난이도가 치솟곤 했다.
비교적 화가 많고 감정조절이 서툰 남편과의 대화는 늘 쉽지 않았다. 감정이 상했을 때 바로 얘기해 주면 미안하다 사과하고 풀 수 있었을 텐데, 남편은 자기감정을 알아차리고 말로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래서 보통은 입을 다물고 참는 것을 택했고, 그러다 참아왔던 감정이 폭발하는 날엔 마음 아픈 말들, 해선 안될 말들로 상처를 입혔다.
남편은 보통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 화가 났다. 예를 들면 에어컨 사용 후 송풍모드로 건조한 뒤에 꺼야 하는 걸 깜빡하거나, 머리를 감고 수채구멍의 머리카락 치우는 것을 깜빡했을 때, 혹은 그릇을 깼을 때처럼 내가 무언가 깜빡하거나 실수를 했을 때 남편은 버럭 짜증을 냈다. 어쩔 땐 기분 나쁜 말을 내뱉거나 불같이 화를 내기도 했다. 나는 남편의 사소한 실수에 대해 화를 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게 이렇게 화낼 일인가??' 싶은데, 남편의 과격한 언행은 충격임과 동시에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내 행동에 화가 난 남편은 과격한 언행을 보이고, 나는 남편이 화난 이유를 모르지만 남편의 행동에 화가 나고, 이렇게 입장이 다른 상태에서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싸움 패턴이었다. 서로 화난 포인트가 다르고 둘 다 감정이 상해있기 때문에 대화의 난이도는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자, 이제 어떻게 대화하면 될까?
먼저 나쁜 예를 들자면 서로 자기 얘기만 하는 거다. 남편은 자기가 왜 화가 났는지에 대해, 나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내 서운함에 대해. 지금 생각하면 우리의 대화가 딱 '나쁜 예'였던 거 같다. 좋은 대화란 상대방의 얘기를 경청하는데서 시작한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 테지만, 내가 간과했던 것은 '경청'이 단순히 '듣는 것'과는 다르다는 거였다.
"나는 제대로 수용받은 적이 없어" 남편이 나에게 늘 하던 말이다. 난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미치고 팔짝 뛸 거 같은 기분이었다. 누구보다 남편의 말을 열심히 듣고 남편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고 노력도 하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며 오해를 풀어보려 부단히 노력하는데 더 이상 무슨 수용을 바란다는 건지 너무 답답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남편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남편이 말한 수용은 단순히 얘기를 들어주고 리액션을 하는 게 아니라 남편이 기분 상할 만했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공감하고, 사과해 주는 것이었다.
얘기를 듣고 "OK 들었어. 무슨 말하는지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러면 되지?" 이렇게 넘기는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과 억울함을 '일단' 내려놓고 최대한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고 이해해 보려는 마음가짐으로 듣는 것. 그렇게 경청하고 진심으로 반응할 때 상대방은 비로소 자신의 말과 감정이 수용받는다고 느끼면서 상한 감정이 풀리는 거였다.
반면 나는 늘 내 억울함과 남편의 행동에 대한 속상함이 머리를 가득 메운 채로 대화를 했다. 남편이 얘기하면 열심히 듣지만, 들으면서도 내가 다음에 할 말과 남편이 한 행동이 잘못 됐음을 알려주려는 준비를 했던 거 같다. 그건 대화를 하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싸우자는 거나 다름없고, 상대방의 기분을 전혀 풀어주지 못하는 행동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대화의 목적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있지 않다. 서로 상한 감정을 풀고,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당시에는 내가 그런 목적으로 대화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나의 서운함을 풀고 남편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더 집중한 게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참으로 부끄러운 부분이다. 누가 잘했고 잘못한 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그렇게 싸웠는지..
그럼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대화할까?
일단, 먼저 감정이 상한 건 남편이기 때문에 내가 남편의 얘기부터 충분히 들어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과 서운함은 잠시 내려놓고 남편의 마음부터 푸는 거다. 입은 닫고 귀를 열어 최대한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온 마음을 다해 듣는 거. 대화를 잘한다는 건 이런 거였는데. 나는 사실 5년간 그렇게 싸우면서도 이런 자세로 남편의 말을 들으려고 한 적이 거의 없는 거 같다. 남편의 말이 너무 상처가 돼서 늘 다신 그러지 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서지 않았나 싶다.
상대방의 말을 끊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들으면 사실 이해 못 할 게 없다. 남편도 나름의 입장이란 게 있고, 내가 미처 배려하지 못한 본인의 화남포인트들이 있었을 거다. 그 화를 그릇된 방식으로 푼 건 분명 잘못이지만 그 잘못을 지적하기 이전에 마음부터 풀어줬어야 했다. 행여나 남편이 이해가 안 돼도 "너의 심정을 다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네가 충분히 그런 감정이 들었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 기분상하게 해서 미안해" 정도의 얘기는 못할 것도 없다.
그렇게 먼저 기분이 상한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고 나면 이제야 상대방도 비로소 내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된다. 그럼 이제 내 차례인 거다. 좋은 대화란, 대화를 잘한다는 것은 이렇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서 한 명씩 응어리진 감정을 풀어내고 입장차이를 줄이는 것이었다. 서로 감정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를 해봤자 진전이 없거나 더 심한 말을 하게 돼 감정만 상하고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딱 2가지만 명심하자.
1. 먼저 기분이 상한 사람의 마음부터 풀어주기.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으면 가위바위보도로 정해도 상관없다)
2. 상대방의 말을 끊지 말고, 내 생각과 감정은 잠시 내려놓고 상대방 입장에서 온 마음을 다해 경청하기.
이 두 가지 원칙만 지켜도 소모적인 대화가 아닌 좋은 대화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좋은 대화를 막는 2가지인데, 이걸 깨닫는데 정말 오래도 걸렸다. 내가 결혼생활을 통틀어 크게 통감한 것이 바로 이 중 하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이어가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