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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이 당연함이 되면 생기는 일

by 온호류



(전) 남편의 폭언, 남편을 화를 돋우는 나의 말투나 표정, 잘못된 대화패턴 등 눈에 보이는 갈등은 알아차릴 수 있고, 문제임을 인식할 수가 있다. 일단 인식을 해야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개선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도 하게 된다. 하지만 문제인지조차 모르게 진행되는 것들은 이미 다 망가지고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돼서야 깨닫는다.


우리의 이혼이 한순간에 이루어지고 한순간에 결정 난 것이 아니듯, 알게 모르게 우리의 관계를 서서히 망쳐온 것들이 있다. 국지성 집중호우 마냥 갑자기 몰아쳐 극심한 피해를 주고 가는 것이 아닌, 가랑비에 옷 젖듯 알아차리지도 못하게 서서히 우리를 멀어지게 한 것들 말이다.




우리도 결혼초에는 사이가 좋다 못해 사랑이 넘쳤다. 서로를 끔찍이 위했고, 서로의 못남 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는 충분한 사랑이 있었다. 그땐 서로가 서로임이 너무 감사했고, 좋았고, 그래서 예의를 갖췄고, 존중했다. 하지만 같이 살면서 조금씩,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미세하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 곁에 있음을 당연히 여기게 됐다.


우리가 부부가 된 것, 함께 살고 있는 것, 남편이 바쁜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는 것, 내가 남편의 반복적인 실수를 용서하는 것 등 우리가 상호작용하고 있는 모든 것에 사실 당연한 것은 없었다. 내가 모르는 남편의 노력과 심적 부담, 남편이 모르는 나의 수치심과 두려움. 부부라고 모든 것을 다 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사랑이란 이름으로 홀로 견뎌야 하는 것도 있었다.


결혼생활이 잘 흘러가고 있다는 건, 행복하다는 건, 내가 모르는 배우자의 고충과 희생의 결과물일지도 모르는 거였다. 그리고 결혼생활이 힘들어지는 건 배우자의 행동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지 않을 때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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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결혼하는 걸 망설였다. 당시 둘 다 31살이었으니 모아 놓은 돈도 많지 않고, 연봉이 더 높은 곳으로 이직하고 싶어 했다. 나도 아직 대학원생이다 보니 학교에서 받는 100만 원 남짓한 돈이 전부였기 때문에 남편은 좀 더 자리를 잡고 결혼하길 원했다.


당시 출퇴근이 너무 힘들었던 나는 캠퍼스 내에 있는 대학원 생활관(아파트)에 들어가고 싶었고, 기혼인 대학원생만 입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혼인신고서가 필요했다. 나는 남편에게 어차피 할 거면 그냥 빨리 하자고 설득했고, 나의 계속되는 설득에 남편은 결국 못 이기는 척 넘어가줬다. 그렇게 부모님께 전화로 허락을 받고선 결혼식도 상견례도 없이 혼인신고부터 하면서 우린 부부가 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남편에게 고마운 것투성이다. 안정적인 성향의 남편이 나를 위해 무리한 선택을 감행한 것, 상견례도 전에 혼인신고를 하는 전례 없는 일에 시어머니를 설득해 준 것, 나의 말을 믿어준 것, 자신의 처지보다 나의 힘듦을 더 신경 써주고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려 한 것 등 고맙고 또 고마운 것뿐이다. 하지만 당시엔 이렇게까지 고마워했나? 싶다. 내 뜻대로 해준 것에 대해 물론 고마워했지만 남편도 왕복 4시간 걸리는 출퇴근 시간이 10분으로 단축됐고, 서울 아파트에 사는데 월세가 40만 원 정도였으니 너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꽤 괜찮은 선택이었으니 둘 다 좋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문제는 바로 이런 생각에서 온다. 상대방이 내게 베푼 호의와 배려를 내 멋대로 재단하는 것. 남편이 어떤 마음으로, 어떤 각오를 하고 나의 부탁을 들어준 건지 알지도 못하면서 '이 정도면 나쁜 조건은 아니니까'라며 고마운 마음을 스스로 반감시키는 거 말이다. 이런 합리화는 '고마운 것'을 '그럴 수도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시간이 흘러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비단 이런 선택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참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이런 나와 결혼해 준 것. 더 예쁘고, 더 능력 있고, 더 상냥하고, 더 성숙한 여자가 이 세상에 분명 있음에도 그중 나를 선택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 나의 단점을 참아주고 보완해 주며 내 옆에 있어주는 그 고마움만으로도 남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은 충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 정도면 그래도 괜찮지', '남편도 단점이 있잖아 서로 마찬가지인데 뭘' 이런 식으로 고마운 것들을 스스로 합리화시켰던 거 같다. 그럼 감사함은 사라지고 존중의 마음 또한 약해지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마음은 평소 마음 깊이 새겨진 감동과 감사로부터 나온다. 배우자에게 고마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다툼이 있거나 갈등이 있을 때 좋지 못한 태도가 나가기 쉬워진다.


나는 남편이 화가 났을 때 폭언이나 욕설을 하며 나를 소중히 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도 모르게 그가 내 옆에 있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해주는 수많은 고마운 것들을 남편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걸로 퉁치면서 더 이상 고마워하지도 않았던 거 같다. 그리고 어느샌가 나 또한 남편을 소중히 대하지 않았다.

남편의 폭언 때문이었는지, 내 성향이 그랬던 거였는지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서서히 거둬갔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존중도 신뢰도 점차 사라져 갔던 거 같다.




서로에게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는 것은 결혼생활의 기본 중 기본이다. 이게 안 지켜지면 부부관계는 점점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만드는 것은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배우자에 대한 감사함이다. 작은 것에 감동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좋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부부사이는 내가 얼마나 결점이 많고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 될 때 좋아지는 듯하다. 이렇게 부족한 내 옆에 있어주는 배우자에 대한 고마움이 생기기 때문에. 결혼을 하면 좋은 것도 많지만 수많은 불편한 것들도 있는데,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나와 결혼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고맙고 또 감사한 거다. 상대방이 언제라도 날 떠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내 곁에 머물러주는 것에 대해 늘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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