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랭했던 겨울에 시작한 상담은 봄, 여름 두 개의 계절을 지나오며 이런저런 변화의 싹을 틔웠다. 상담을 받으며 세 번이나 이혼 위기가 있었지만 가을이 됐을 무렵, 우리 사이는 꽤나 돈독해져 있었다.
대화 방법의 문제를 인식하고, 상담선생님의 분석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시간을 보내니 전우애인지 미운 정인지 모를 놈이 우리를 떨어지지 못하게 더욱 단단히 동여맸다.
우린 작게나마 성장했고 싸우거나 대화할 때 상담에서 배운 것을 적용해 보려 애쓰기도 하고 서로의 행동에 대해 상담 선생님처럼 분석적으로 접근해 보기도 했다. 그 분석 시도 중 유의미했던 것은 (전) 남편의 '이중메시지'에 대해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이중메시지(double message)란, 말을 할 때 두 가지 이상의 모순되거나 상반된 메시지를 비언어적 표현(표정, 말투, 행동 등)을 통해 동시에 전달하는 의사소통 방식이다. 듣는 사람은 상대의 감정을 파악하기 어렵고, 혼란과 스트레스를 느끼게 된다.
상담을 받으면서도 자주 싸웠고 선생님의 도움으로 화해하기를 되풀이하다 보니 싸움의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만을 쌓아놨다가 작은 계기로 한꺼번에 폭발시키는 게 가장 문제였지만 남편의 이중적인 태도 또한 갈등을 촉발했다.
이 태도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처음 시댁 식구들과 가족여행을 다녀온 뒤였다. 우리 엄마도 가끔 그러시지만, 시어머니께서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하고선 지나가는 말로 본심을 드러내는 버릇이 있으셨다. 그러면서 남편의 태도가 여기서 온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 자고 있어~"해서 더 자고 있으면 왜 아직도 자고 있냐며 짜증 내고,
주식은 나한테 맡기겠다고 열심히 공부하라 하고선 폭락하니 지금이라도 손절하라고 닦달하고,
괜찮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있는데 틱틱 짜증을 내고 자꾸만 과거 얘기를 꺼내는 남편의 태도는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게 하고 진짜 괜찮은 게 맞는지 계속 눈치를 보게 했다.
이전 글에서 얘기했듯 나도 엄마의 단점을 알게 모르게 배워 그대로 남편에게 하고 있었고 남편 또한 어머니에게 배운 것을 나에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을 뜻하는 '이중메시지'라는 개념이 있고 이게 문제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이제야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한 번은 저녁 메뉴를 감자 짜글이로 정하고 남편이 바로 요리를 시작할 수 있게 도마와 재료들을 꺼내놨었다. 요리를 도우려 했었는데 퇴근 후 집에 오더니 자기가 할 테니 방에서 공부하고 있으라고 하는 거다. 돕겠다 했는데도 괜찮다고 하길래 방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재료를 썰다가 자꾸 도마 밖으로 튀어나가니 왜 작은 도마를 꺼내 놨냐며 성질을 내는 거다. 나가보니 남편이 씩씩거리며 큰 도마를 꺼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니 이렇게 작은 도마를 꺼내놓으면 뭘 어쩌라는 거야?"
"난 이거면 충분할 줄 알았지."
"이런 걸 꼭 말해줘야 알아? 평소 요리를 안 하니까 모르지."
"그럼 나보고 썰라고 하지~ 너가 하겠다며. 아님, 작은 도마 봤을 때 큰 도마 꺼내라고 하면 됐잖아."
"그냥 꺼내놓은 거 쓴 거지. 아 됐어. 짜증 나니까 저리 가."
"……."
이렇게 밥 먹기 전 남편의 태도에 밥맛이 뚝 떨어진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작은 도마를 꺼내 놓은 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아님 다른 불만이 있는 건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남편이 던진 짜증을 받아 들고 영문도 모른 채 우두커니 서있으면 받은 짜증을 남편 등뒤로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나까지 짜증을 내면 싸움이 커지니 보통은 아무 말 없이 서먹하게 밥을 먹고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상담을 통해 달라진 남편은 짜증 내서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고, 나는 요리하기 싫은 날은 그냥 나한테 시켜도 된다고 했다. 다행히 식사가 끝날 때쯤엔 둘 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다음 날이 상담이어서 자연스럽게 이 얘기가 나왔고, 가족 여행 후기를 전하며 어머님의 이중메시지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상담선생님께서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남편의 마음을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다. 남편은 나에게 이중메시지를 보낸 거고 내가 남편의 마음을 몰라주자 짜증이 난 거라고. 여기서 도마는 상황일 뿐, 남편은 내가 옆에 있어주지 않은 게 서운했던 거다.
사실은 내가 옆에서 요리도 돕고 자기가 힘든 걸 알아차려줬으면 했는데 바빠 보이니까 그냥 자기가 혼자 하겠다고 배려한 거였다. 하지만 상황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눌러둔 마음이 올라오면서 사소한 거에 짜증이 난 거였다. 도마 때문이 아닌, 머리로는 배려해주고 싶은데 감정이 안 따라주는 상황에서 오는 짜증이었던 거다.
평소 요리를 해오며 베푼 호의가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한 서운함이 쌓인 걸 수도 있다고 하셨다. 내가 하겠다고 해도 요리하기 싫어하는 걸 아니까 자기가 하겠다며 배려한 게 여러 번 있었는데, 싫다는 거 구태여 시키기 싫은 마음과 자기를 도와줬으면 하는 마음이 충돌하면서 쌓여있던 감정도 한몫했던 거 같다.
물론 남편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한 잘못이 크지만 내 입장에선 억울하기도 하다. 들어가서 일하라길래 그렇게 했는데 속마음은 옆에 있어주길 바랐다니…. 내가 돌려 말하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남편이 말하면 그냥 그런 줄 알았다.
이중메시지가 계속되면 어느 쪽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려하다가 자포자기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을 혼란스럽게 한 것에 대한 대가로서 무관심으로 응징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도 두 개의 감정이 충돌하니 괴롭고 듣는 사람의 정신도 피폐해지니 이중메시지는 부부 관계에서 비극을 초래할 뿐이다.
"오늘은 내가 힘드니까 네가 도와주면 좋겠어"라고 분명하게 말했으면 남편도 짜증 나지 않았을 거고 나도 기분을 맞춰주려 노력했을 거다. 남편은 배려해주고 싶은 마음에 진짜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았고, 결국 화를 냄으로써 이중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억울하고 남편은 서운한, 서로 기분 나쁜 상황이 만들어진 거였다.
결혼생활을 들여다보면 소소한 이중메시지의 예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내가 뭔가를 시키고 남편이 귀찮아하며 일을 미루면 아내가 "됐어, 내가 할게!" 하고는 물건을 쿵쿵 던지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는 것도 "그냥 내가 하자"라는 "마음과 남편이 해줬으면" 하는 마음의 충돌이자 이중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사실 나조차도 이중메시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위의 예시처럼 나의 부탁을 상대방이 귀찮아하는 듯 보이면 "안 해줘도 괜찮아!"라는 서운함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포커페이스에 매우 능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묻어있는 감정들을 어찌 말끔하게 털어낼 수 있겠는가.
상담선생님이 반복해서 강조하신 말이 있다.
"원하는 바를 정확히 말해야 해요. 명확하게 얘기해 줘야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어요."
의사소통의 기본은 원하는 바를 확실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는 거라고 하셨다. 모호함은 상대방의 해석이 들어갈 여지가 많아서 오해를 부르기 쉽고 상대방에게 와닿지 않기 때문에 기억에서도 쉽게 잊힌다고.
사회생활이나 친구관계에서는 속 마음을 숨긴다기보단 어쩔 수 없이 상대방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경우가 더 많지만 '남'이기 때문에 이해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배우자는 나와 동일시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거절을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들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부부관계에서는 더욱 솔직한 속마음을 전해야 하는 거 같다.
"안 해줘도 괜찮아!"가 아닌 "당신이 꼭 해줬으면 좋겠어!"라고 내 의견을 분명하게 전하는 거다.
선생님은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말하려면 내 감정이 어떤지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한다고 하셨다.
"알아차리지 못한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해요. 알아차리지 못한 감정을 같이 고민하고, 이해받고, 해결되면 그 감정은 거짓말처럼 없어져요!"
내 감정에 대해 모호하면 상대방도 모호해지고, 내가 명확하면 상대방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되는 거라고. 짜증이 난 진짜 원인과 핵심 감정이 뭔지 알아내고 진짜 감정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게 완전하고도 진정한 대화라고 하셨다.
대전에서 자주 만나던 내 친구들을 남편이 불편해했다는 사실을 상담을 하면서 남편 스스로 깨닫게 됐다. 자기와 결이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만나기 싫다고 거절도 못 하고 계속 함께 시간을 보내온 거다. 친구들과 함께 만나면서 혹은 만나고 오면 유독 자주 싸웠었는데, 이유를 모르지만 기분이 안 좋으니 나에게 더 짜증을 내게 되는 거였나 보다.
불확실했던 남편의 감정이 확실해지니까 나에게 명확히 전달할 수 있었고, 단번에 남편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 더 이상 함께 만나자 하지 않으니 싸울 일도 없어졌다.
여러 에피소드와 다툼, 그 모법 답안을 쭉 훑어보고 나니 결국 부부관계에서 대화로 인한 갈등을 줄이는 방법은 딱 이 두 가지만 잘하면 되는 듯했다.
1. 내 감정을 정확하게 알아차리고,
2. 상대방에게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
이성과 감성이 명확하게 분리되고, 바다와 같은 이해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이중메시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을 거다. 상해버린 마음을 감정 하나 안 섞고 상대방에게 웃으며 전달하는 것 또한 현자들이나 가능한 걸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서 나아가야 하는 옳은 방향을 아는 것만으로도 관계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무언가 시도해 보게 하고 개선점을 찾는 데 도움을 준다. 희망의 빛을 잃지 않고 부족함을 개선하며 나아간다면 망가진 부부관계도 변화가 싹트는 시기가 올 거다.
그런데, 싹트는 시기를 앞두고 우리 사이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나도 내가 이럴 줄은 몰랐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이 점점 나아질수록 나는 점점 포악해졌다.
-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