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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에서 배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

by 온호류



어느덧 상담의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던 어느 가을날, (전) 남편과 함께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이전 상담에서 상담선생님이 숙제로 내준 질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숙제는 우리 부부가 요즘 사이좋게 지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거였다. 예전과 무엇이 달라져서 안 싸우는지 정확히 인식하고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며 현재 잘 지켜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써보라고 하셨다.


전체적으로 보면 예전에는 둘 다 자기 자신, 자기의 감정이 먼저였는데 지금은 서로를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려 한다는 게 가장 달라진 부분이었다. 그 밖에 다른 이유들도 적어보았다.


1.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깊어짐

2. 대화의 기술이 좋아짐

3. 마음의 여유가 생김 (남편이 특히)

4.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임

5. 서로가 가장 소중함을 느낌

6. 헤어짐을 생각하지 않음


적어놓은 6가지 다 맞는 얘기지만 돌이켜보니 결국 이 시기에 우리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단 한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나머지는 자연스레 따라오거나 부수적인 것일 뿐이었다.


이번 상담에 배운 것은 그 한 가지를 깨닫는 방법이었다.



부부십계명.jpeg



숙제가 하나 더 있었다. '부부십계명'을 작성하는 것.


남편과 저녁 먹고 틈틈이 십계명을 작성했고 두 개의 숙제를 잘 완료한 뒤 18번째 상담을 가는 지하철에서 내가 말을 꺼냈다.


"우리가 자주 싸우는 이유는 아무래도 '비난'인 거 같아. 십계명에 '작은 실수에 비난하지 않고 용서한다' 이런 내용을 넣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때?"

"…… 싫어"

"왜?"

"아 몰라, 그냥 싫어"


방금까지 그리 나쁘지 않던 남편의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다. 왜 그러냐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덩달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갑자기 성내는 그의 태도가 너무 예의 없게 느껴졌다.


남편이 이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면 왜 싫은지, 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졌는지 영문도 모른 채 가는 길 내내 나 또한 불편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요즘 우리 사이가 꽤나 좋았기 때문에 대조적으로 더 기분이 안 좋아진 것도 있다. 사이좋게 가다가 갑작스레 둘 다 입을 다물고 서먹하게 있으려니 비슷했던 과거의 서러운 순간들이 마구 떠올랐다. 남편의 급작스런 감정 변화에 내 기분까지 롤러코스터를 타야 했던 순간들.



IMG_4061.HEIC 안 만질 수 없던 귀엽고 순한 아이


신혼여행에서 위험하니까 만지지 말라고 한 들개를 만졌다는 이유로 내 핸드폰을 던지고 사라져 버렸던 남편. 핸드폰도 안 터지는 우유니 시내에서 울 겨를도 없을 만큼 긴박하게 남편을 찾아 헤매던 그 순간은 우유니 사막의 아름다움이나 마추픽추의 경이로움보다 신혼여행을 떠올리면 먼저 눈앞에 펼쳐지는 서글픈 장면이다.


양양 여행을 갔을 때에도, 제주도 여행을 갔을 때에도, 친한 지인들과 가족 여행을 갈 때에도. 기념일의 특별함이나 여행의 설렘 따위는 남편이 화를 참아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이 남편을 화나게 한지도 모른 채 남편이 쏟아내는 감정의 소나기를 그저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더욱이 이혼 생각을 하기보단 남편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남편의 화를 탓하지 않았다. 마땅히 내가 보듬어줘야 하고, 화나지 않게 해야 하고, 남편을 잘 타일러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욕을 하고 언성을 높이지 않아도 화가 나는 이유를 차분히 얘기해 줄 수도 있던 건데, 꼭 핸드폰을 던지고 이혼하자며 혼자 공항으로 가지 않았어도 얘기해 주면 됐을 일인데 아무 저항 없이 남편의 그런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던, 하염없이 비를 맞기만 하던 내가 참 불쌍하다.


과거로 돌아가 굳이 계속 맞고 있지 않아도 된다고, 잠깐 어디 들어가 피하든 비가 오는 이곳을 아예 떠나버리든 맞지 않아도 된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 하다못해 우산이라도 쥐여주고 싶달까.


IMG_4078 2.heic 남편은 이 사진을 찍다가 핸드폰을 던지고 사라졌다



남편은 어떤 생각을 하며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여행 갈 때마다 크게 싸웠던 일들이 하나 둘 떠올라 씁쓸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상담실에 도착했다.


상담선생님은 우리의 이상기류를 포착하시고 이유를 물어보셨고 그 과정을 설명하면서 나는 남편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은 '작은 실수에 비난하지 않고 용서한다'라는 계명에서 무시를 느꼈고, 평소 불만이던 나의 모습이 떠올라 불쾌해졌다.


남편은 자기 기분은 풀리지 않았는데 나 스스로 나의 잘못을 별거 아닌 걸로 생각하고 용서해 버리는 태도를 끔찍이 싫어했다. 그가 화를 내면 사과를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지! 뭐 이런 걸로 그렇게 화내!"라고 하는 내 태도에 더욱 화가 난다고 했다.


'사소한 실수는 용서하자'라는 말에서 '사소한'거라고 이미 나의 판단이 들어가 있는 데다, 그를 사소한 거에 화내는 옹졸한 사람으로 보는 무시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듣는 순간 기분이 나빴다고.


남편은 아마 오는 내내 '누구 마음대로 사소하대?' 라며 속으로 씩씩거리고 있지 않았을까?


남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불찰인 것을 인정한다. 내 기준엔 정말 별거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감정이 상했다면 내 기준이 아니라 상대방 기준에서 생각하고 이해해줘야 하는 게 맞는데 나는 보통 내 기준에서 판단하고 감정이 상한 남편을 달래줄 줄 몰랐다.


말하면서 다시 화가 올라온 남편은 과거 얘기를 꺼내며 나를 비난했고, 나도 참지 않고 받아쳤다. 졸지에 상담선생님 앞에서 부부싸움이 시작된 거다.




22년 11월 12일 토요일. 18번째 상담 (2시간)


*진행한 것

1. 십계명 써온 것에 대한 코멘트를 받음.

→ 이것에 얽매이기보단 초월해야 한다. 이런 것을 지향하기 위함이지 못 지킨 것에 대해 비난하면 안 됨.

2. 오는 길에 십계명 만들다 싸운 것에 대해 풀어서 얘기해 주심.

→ 남편은 나의 언어에서 '무시'를 느낌. 나는 남편의 급격한 감정변화에 지침.


*상담 선생님의 의견

1. 뭔가에 짜증 나고 기분이 나쁘다면 왜 기분이 나쁜지 그 내면에 뭐가 숨어있는지 같이 파헤쳐 보는 게 중요하다.

2. 내가 어떻게 말했냐보단 상대방이 어떻게 느꼈냐가 중요하다. (적어도 사랑하는 사이에선)

3. 감정이 쌓이기 전에 미리미리 사실 그대로를 터놓고 얘기하는 게 좋다. 오해가 쌓이고 나면 푸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안 쌓이게 하는 게 최고!






"가혜씨, ㅇㅇ씨 둘에게 가장 소중한 건 뭐예요? 사람이든 물건이든 뭐든요."


선생님은 우리가 싸우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돌연 대화를 중단시키고는 친히 우리 둘의 이름을 부르며 질문하셨다. 생각할 시간을 주시려는 듯 잠깐 뜸을 들인 후 남편에게 먼저 답을 요구했고 남편은 우물쭈물 대답했다.


"가혜요."


내 대답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가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아무리 큰 행복을 준다 해도 함께 기뻐할 남편이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소중한 것을 보통 어떻게 다뤄요?"


"소중하게.." 우리는 동시에 답했다.


"근데 지금 가장 소중한 걸 어떻게 다루고 있어요?"


"……."


선생님은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면 보통 답은 이미 나와있다고 하셨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지 계속 상기시켜야 한다고. 뭘 해도 예쁘고, 뭐든 다 해주고 싶고,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임을 계속 떠올려야 한다고 하셨다.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인가?"


그렇다. 이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매 순간 물어봐야 할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질문이었다.



IMG_3037.heic 우유니 사막의 일출



우리가 최근 몇 개월간 사이좋을 수 있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계속 상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담을 통해 각자의 마음을 좀 더 이해하게 되면서 조심하게 된 것도 있지만, 상담을 평소보다 짧은 간격으로 가다 보니 2주에 한 번씩 마음을 확인하고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 말처럼 내 앞에 있는 배우자가 뭘 해도 예쁘고 얼굴만 봐도 행복한, 결혼을 결심할 때의 그 마음처럼 뭐든지 다 함께하고픈 그런 사람임을 매 순간 기억한다면, 태도는 자연스럽게 좋아질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배려하게 되고, 상냥하게 말하게 되고, 잃는 것이 무서워 함부로 하지 않게 된다. 아무리 화가 나도 직장상사에게, 학교 선생님에게 혹은 교수님에게 마구 화를 내지 않듯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안다면 그렇게 예의를 갖추고 내 감정을 조절하게 된다.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 더 함부로 하게 되는 이유는 내 옆에 있는 게 너무 당연해지면서 짜증의 순간에 그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유명한 말처럼 익숙함에 속에 소중함을 잊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현관문에, 냉장고에, 식탁에 빽빽이 적어서 눈에 안 들어오는 이 십계명 대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이라는 물음을 크게 붙여놨다면, 우리 사이는 조금 달라졌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부부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여러 방법론적인 것들이 많지만, 사실 이 질문의 답을 하루에 몇 번이고 떠올릴 수 있다면 행동 또한 자연스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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