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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표고 Mar 12. 2024

인정 욕구를 내려놓다

“아빠 나 일등 했어요”

“음.. 몇 점인데?”

“어.. 98점?”

“왜 100점이 아니냐. 더 노력해라.”


초등학교 1학년. 처음으로 시험이라는 것을 보고 그것으로 반에서 등수가 매겨져서 1등이라는 것을 경험했을 때, 나는 집에 돌아가면 박수와 칭찬이 기다리고 있을 것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잘했다는 그 쉬운 말은커녕 심지어 미소조차 지어주시지 않았고, 나는 시험지를 들고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망설였다.


아버지는 기억하는 유년시절 내내 참으로 칭찬에 박한 분이었다. 예쁘다, 잘한다, 착하다.. 그런 종류의 말은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우리 집은 언니와 나 둘인데 중3쯤 되어서 언니가 안드로메다급으로 비교가 불가능한 0.01%의 영재의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우리는 늘 비교되며 칭찬에 고파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초등학생 때 언니와 내가 둘 다 1등을 했던 적이 있는데 나는 전부 100점으로 1등을 했고, 언니는 한 두 개 틀리고 1등을 했더랬다. 그랬더니 아빠는 누구도 칭찬해주시진 않고 언니한테 이렇게만 말씀하셨다.


“동생보다 못하면 쓰냐.”


언니는 한참 후 나한테 말했다. 그때 그 말이 너무 화가 났고 머리에 콱 박혀서 굉장한 오기가 생겼다고. 그래서 그 이후로 공부에 미쳐서 살았고, 외고를 가고 S대를 거쳐 지금의 전문직까지 오게 된 시발점이 그때인 것 같다고 말이다. 왠지 납득이 갔다.



언니 못지않게 나도 꽤 소문난 모범생이긴 했다. 중고등학교 내내 집-학교 밖에는 몰랐고 이성친구도 사귀어 본 적 없었다. (사실은 사귀고 싶었지만 너무나도 보이시한 외모로 학교에서 여자선후배들에게 러브레터를 받기까지 했다는 과거는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겠..) 그런데 언니와 나와의 차이점은 언니는 오기가 생겼던 그 시점 이후에 열심히 하다 보니 공부에 진심으로 흥미를 느껴버리는 굉장히 이상적인 전개가 있었다는 것과 달리, 나의 원동력의 7할은 거의 인정욕구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기가 어려우니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고 싶어서 이상적인 모범생을 거의 연기하며 지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일까. 굉장히 외로웠다. 진짜 나로 살지 못하는 거 같은 기분이었다.



중고등학생 시절을 재미없는 모범생으로 살고도 원하는 대학에는 가지 못 했다. 대학합격 소식을 전했을 때 아빠는 딱 한 마디 하셨다.


“재수해라.”


고등학교 때 무리해서 공부를 하느라 건강이 많이 나빠져서 재수를 할 엄두는 못 내는 상황이라 나는 그냥 진학을 선택했고 아버지의 칭찬으로부터 나는 더욱 멀어졌다.



내가 인정욕구가 굉장히 심하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나는 부당한 것에 저항하거나 당연한 걸 요구할 줄 몰랐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행사가 던져졌는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었음에도 그럼 내 무능을 시인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러면 버려질 거 같았다. 그래서 아직 자리도 낯선 사무실에 홀로 앉아 일정표를 짜고 네임택을 만들면서 묵묵히 일했다. 깜깜한 밤에 혼자 퇴근해 저녁도 건너뛰고 쓰러져서 자고서는 다음날 회사에서는 웃는 얼굴로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버려지거나 외면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 그것은 연애할 때도 늘 묵직하게 나를 짓눌렀다. 심지어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인데도 그냥 한 두 번 데이트를 해 본 게 다 인데도 그만 만나자는 연락을 받으면 상처를 받았다. 나는 사랑받기에 부족한 사람이다라는 프레임을 스스로 씌우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항상 버려질 나를 상상하며 동동거렸다.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 그냥 나 자체로도 괜찮다는 안도감. 그걸 느끼게 해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못했고 그래서 새로운 만남은 늘 희망보다 불안함이 컸다.



그러다 지금 남편을 만났다. 어떤 이의 눈 속에서도 나는 그렇게 반짝인 적이 없었는데 그를 만나면 내가 예쁘다고 느껴졌다. 허당인지라 부딪히고 넘어지는 나를 귀여워해 주고 쉽게 울적해지는 나를 마르지 않는 유머감각으로 헤실거리게 만들었다. 지난 13년을 함께 하면서 내가 그를 만나기 전 살아온 세월 내내 들어온 칭찬의 수보다 훨씬 넘쳐나는 수만큼 그는 나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었다. 내가 뭘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라서 충분하다는 것을 그를 만나고 처음 알았다.



그와 함께 하고 7년쯤 되었을 때, 나는 인정욕구를 거의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런 나의 변화를 지켜본 나의 아버지는 어느 날 나에게 사과를 하셨다. 당신이 언니와 나를 단단한 어른으로 기르려는 욕심으로 칭찬에 박했던 것이 미안하다고. 사실 자랑스러운 순간이 많았는데 표현이 서툴러서 할 줄 몰랐다고.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고 말이다. 나는 아버지가 유달리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 칭찬은 사치였던 삶을 겪으셨음을 알고 나서는 엄격했던 아버지의 훈육이 나름의 관심이고 사랑이었음을 이미 깨달았기에 원망은 하지 않은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기뻤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참 낯 간지러울 정도로 표현이 넘치는 가족이 됐다. 언니와 나는 서로를 향해 예쁘다고 말해 주며 응원을 전하고, 아버지는 연락의 말미에 꼭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한다. 시작이 어려웠을 뿐 한 번 시작하고 나니 칭찬이나 감사는 참 쉬운 것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럽게 표현을 많이 하는 이모가 됐다. 내가 칭찬에 대한 결핍으로 시달렸던 청소년기를 내 조카들은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난 오늘도 문자로 통화로 외쳐댄다. 사랑한다, 잘한다, 예쁘다고.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이제 필요 없다거나 자존감이 넘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의 쓸모를 찾지 못하고 타인의 인정에서 나의 가치를 확인하기에 바빴던 삶에서 그냥 나라는 존재 자체로 살아야 할 이유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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